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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12.2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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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칸의 띳집이 숲속 그늘에 있었는데 넓은 뜨락 한 모퉁이 뾰족한 돌무더기를 모아 금강산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바위에는 이끼 무늬가 어룽대고 그런 사이에 전서(篆書) 글씨를 새겨 넣으니 제법 예스러운 모습으로 보였다. 방안에는 쓸쓸하게 다른 물건은 없었고, 더부룩한 눈썹에 성긴 수염은 청고(淸高)한 골상(骨相)이 마치 깡마른 학(鶴)의 모습 같았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한 세대 이상 후배이던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1) 는 아버지(崔碩英)가 연천현감으로 근무하던 1665년(현종 6년) 16살의 나이로 당시 71세의 허목을 찾아가서 만났는데 미수의 생전 모습과 사후의 유상(遺像)으로 전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대단한 관찰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허목은 3년 전에 삼척부사직을 사임하고 5대조 허훈(許薰)을 비롯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로 낙향하여 독서와 저술에 힘을 쓰며 십청원(十淸園)과 괴석원(怪石園)을 만들어 도가적인 삶을 살며, ‘청고(淸高)한 학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다가 간 미수 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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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목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1595년(선조 28) 한양의 창선방(彰善坊)2)에서 태어나서 68세에 선조들의 고향인 연천에 정착할 때까지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다.
   유년시절은 7년 전쟁, 임진왜란의 와중이었고, 15세 부터는 부친의 임지를 따라 20년 가까이 여러 곳을 전전했는가 하면 한창 일할 나이인 32살 때에는 인조(仁祖)로부터 정거(停擧)3)를 당하여 좌절을 겪는데 후에 벌(罰)이 풀렸음에도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란(胡亂)을 겪으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1646년(인조 24) 선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향리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어머니가 의령에서 돌아가시자 연천의 선산에 장례를 치르고 3년 후, 56세에 비로소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고, 내시교관, 조지서 별좌, 공조좌랑, 용궁현감, 지평 등 매년 새로운 벼슬에 제수되고 바로 사임하고 하는 일이 10년 가까이 반복된다. 허목은 왜 그렇게 관직을 맡지 않으려고 했을까? 아마 이것은 증조부 때부터 시작된 불행에 연유한 때문일 것이다.
    증조부 허자(許磁;1496~1551)는 문정왕후 시절 문과에 합격하여 박사ㆍ수찬을 거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4)하여 교리ㆍ응교ㆍ검상ㆍ전환 등을 역임한 뒤 이조정랑에 오르는 등 순탄한 관리생활을 이어 나갔다. 명종이 즉위한 이후 호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을 때,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과 함께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제거에 가담,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으로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좌찬성(종1품)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등 영화를 누렸으나 이기(李芑) 등 과 대립하면서 그들의 미움을 받아 함경남도 홍원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박람강기(博覽强記)5)하여 심성이 높고 깨끗하여 이달(利達)6)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아들 허강(許橿:허목의 조부)은 아버지가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홍원으로 귀양 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여막살이를 하는 등 매우 슬퍼하였다. 그 행동거지가 바르고 곧아서 여러 차례 조정으로부터 부름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40년간 강호(江湖)를 방랑하면서 옛사람의 책으로 스스로 즐거움을 찾고 다른 사람과 교유를 사절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 토산에서 피난하던 중 그곳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허목의 아버지 허교(許喬)는 이런 배경에서 성장하여 난중(亂中)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니 25세의 나이에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책임감으로 종9품 군자감 참봉부터 시작하여 여러 미관말직을 거쳐 25년 만에 종6품 거창현감의 자리에 올랐고, 포천현감을 마지막으로 65세로 임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약 40년 동안의 벼슬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평소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까. 평소에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고, 32세 때 자신이 옳다고 행한 일에 대하여 인조(仁祖)가 글공부하는 선비에게 가장 치명적인 벌(罰)인 정거(停擧)의 조치가 내려짐으로서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리고 조부(祖父)처럼 전국을 유랑하며 스승을 찾고, 글공부에 매달렸던 것이다.  
   1650년(효종 1) 정월 56세의 나이로 비로소 추천(推薦)으로서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자 그의 어머니가 "선인께서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자 그는 수긍하고 관직에 나갔으나 1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651년(효종 2) 10월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임명되었다.
  1652년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 정육품 조지서 우두머리 )에 제수되어 상경하였으나 그해 6월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자 사직하고 내려가 부임하지 않았다. 벼슬을 제수하면 바로 사직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63세인 효종 8년(1657) 지평(持平: 사헌부 정오품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1년 만에 장령으로 옮겼고, 현종 즉위하여 사헌부 장령(掌令: 정사품 관직)으로 예(禮)를 간쟁(諫爭)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부사의 자리도 노론의 무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60개월(5년)의 임기도중인 2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허목이 내직(內職)7)이던 외직(外職: 지방관) 이던 임금이 제수하는 직책에 오래 있지 못하고 거듭 사직을 하게 되는 것도 선조(先祖)들의 순탄치 못했던 관직 생활과 아버지의 유훈(遺訓) 등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점차 깊어가는 당쟁의 폐해로 조정의 말단 하리(下吏)까지 노론의 무리로 가득 찬 상황에서 관리로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意志)를 펼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미 효종 시절부터 조정 내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서인들은, 현종 시절 사헌부 장령의 위치에 있던 허목이 제1차 예송논쟁에 밀려 삼척부사로 좌천되어서 10 여년을 연천에서 저술과 독서에만 몰두하다가 숙종의 부름을 받고 대사헌에 임명되어 숙종의 신하로서 궁궐에 출입할 당시의 기록인 《숙종실록(1년~5년)》을 살펴보면 사관들이 편파적이고 주관적으로 사초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록의 주된 내용은 매일 매일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기록한 기사여야 하는데, 당시의 기사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사론(史論)과 같은 논조로 사초를 작성하였고, 사론(史論)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중상모략을 담아 무차별 인신공격을 가하고 있어 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러한 내용이 상당히 많지만 대표적인 내용 하나만 살펴보자.

허목이 소(疎)를 올려 아뢰기를
  “전에 직강(直講)을 지낸 이태서(李台瑞)는 문사(文詞)로 이름이 나서 지금 세상에는 이만한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중략) .........
허목은 을사년559) 간신 허자(許磁)의 손자로서 그의 어미는 시인(詩人) 임제(林悌)의 딸이었다...............(중략) ........... 허목은 밖으로는 대범하고 명랑한 것 같지마는 속은 실지로 간사하였으며, 눈썹의 길이가 거의 한 치나 되었기에 스스로 미수(眉叟)라고 호를 지었다. 그러나 눈초리가 굽고 눈동자가 분명치 못하였다.  .......... (중략) ..........
 허목은 오로지 보복(報復)을 일삼아서 비록 늙고 혼미(昏迷)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그릇되고 잘못됨이 많지마는, 송시열을 공격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앞장섰고, 기관(機關)이 교묘하고 주밀하였다. ...... (하략) ......
                                  (숙종 3권, 1년(1675 을묘) 4월 10일 기사)

 
   이날의 기사는 숙종이 보위에 오른 지 채 1년도 안 되는 숙종 1년 4월 10일의 기사로, 허목이 관직에 추천하여 직강(直講)의 자리에 임명된 이태서(李台瑞)가 서인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 일에 책임을 느낀 허목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기사 말미에 ‘사신은 논한다’는 사론(史論)의 전제(前提)도 없이 허황되고 근거 없는 장문(長文)으로 허목을 극렬하게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선조(宣祖) 때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파당(派黨)의 폐해는 이미 온 조정(朝廷)을 덮어 말단 하리(下吏)로 부터 사관(史官)에 이르기 까지 요소요소에 포진한 파당(西人)의 무리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유일하게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허목을 극렬하게 깎아내리고 있다.
   미수 허목의 학문적인 연원(淵源)8)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수제자인 허목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근기(近畿)지역으로 옮겨 받아 고학(古學)과 고문(古文)이라는 고경(古經)으로 방향을 틀어 ‘근기(近畿)학파’를 열었고, 조선 후기 3대 학자라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성호(星湖) 이익(李瀷),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라는 걸출한 후학들이 뒤를 이어 학문적 연원을 이룩했다.
   허목은 자신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문집을 ‘기언(記言)’이라고 했다. 당시 모두가 ‘문집(文集)’이라 했건만, 선생 자신이 ‘기언(記言)’이라고 정했다. 굳이 문집이라고 하지 않고 기언이라고 한 것은 ‘기언(記言)’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허목은 고서(古書)를 무척 좋아했고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穆篤好古書 老而不怠)” 라는 첫 글귀가 선생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웅변하고 있다. 모두가 성리학에 열중하여 송나라 주자(朱子) 이후의 학문에 경도(傾倒) 되었을 때 선생은 옛글, 최소한 이전의 공맹(孔孟)의 학문만을 좋아해서 늙도록 게으르지 않게 그런 부분만 연구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미수의 상고정신(尙古情神), 즉 옛 것을 숭상하는 마음은 흔히 말하는 복고주의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이우성(李佑成) 교수(1925~2017.한문학자, 국사학자)는 밝혔다.

  “고문(古文). 고서(古書)의 ‘고(古)’를 숭상하는 미수의 상고정신은 중세에 대한 부정이며 중세에 대한 부정은 동시에 관념화된 당시의 성리학-주자학 정신 풍토의 부정이다. 주자학적 권위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정점에 도달한 17세기 당시에 그 권위의 구축에 일생의 정력을 바친 송시열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 교수의 주장처럼 주자학적 권위주의를 탈피하려는 변혁의 발단이 바로 미수(眉叟)에게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1, 2, 3차로 이어지는 예송논쟁은 왕권과 신권의 충돌, 또는 단순한 당쟁의 산물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학문적 뒷받침 속에서 허목과 송시열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경쟁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원년(1675) 80세의 나이로 부름을 맞아 1년 동안 5번이나 관직을 옮겨 삼공(三公)에 이르니 81세였다. 14살의 소년왕 숙종은 팔순이 넘은 노신을 극진히 예우하였다. 그러나 경신환국(庚申換局)과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같이 여러 차례 정국을 손바닥 뒤집듯 하여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많은 신하들을 희생시켰다. 허목은 85세에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9)으로 조정에서 남인들이 쫓겨나갈 적에 삭출(削黜)10)을 당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부름을 받지 못하여 88세 되던 해 4월 병이 나서 조석으로 배알하던 선조의 묘를 가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그동안 부탁받은 남의 책 서문, 가장(家狀), 묘문(墓文)과 전서(篆書)를 써달라는 종이를 봉해 돌려주거나 하면서 주변을 정리하며 서제(庶弟)인 달(達)을 시켜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기도록 하였다. 4월 27일 갑진일에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 밖에서 들어와 문안을 여쭙자
    “제군(諸君)들 왔는가, 모름지기 잘 있게.”
   하고서 조금 있다가 편안히 운명했다. 이때가 4월 27일(甲辰) 인시(寅時)11)였다.
   미수 허목은 생전에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숙종은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시독관(侍讀官) 이봉징(李鳳徵)과 승지(承旨) 권환(權瑍)의 건의에 따라 ‘허목(許穆)의 문자를 간인(刊印)토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주(註)
1) 최규서(崔奎瑞) : 1650년(효종 1)~1735년(영조 11) 본관은 해주(海州). 시호는 충정(忠貞).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광주(廣州) 출신. 삼당시인으로 꼽히는 최경창(崔慶昌)의 현손이며, 최집(崔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진해(崔振海)이고, 아버지는 현감 최석영(崔碩英)이다.
 2) 창선방(彰善坊) :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동부 7방 중의 하나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원남동・인의동・연지동・효제동・종로5・6가 각 일부에 해당된다.
3) 정거(停擧) : 조선시대 유생에게 과거 응시자격을 일시적으로 박탈하던 제도.
4)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
5) 박람강기(博覽强記) : 여러 가지 책을 널리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함.
6) 이달(利達) : 이익(利益)과 영달(榮達)
7) 내직(內職) : 서울에 있는 각 관아의 관직 및 수원 · 광주 · 개성 · 강화의 유수(留守). 경관직(京官職).
8) 연원(淵源) : 사물이나 일 따위의 근원(根源).
9) 경신대출척 :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       
10) 삭출(削黜) : 벼슬을 빼앗고 내쫓음.
11) 인시(寅時) : 이십사시(二十四時)의 다섯째 시. 오전 세 시 반부터 오전 네 시 반까지이다.
        
  <연천문인협회 회장>
  <연천군 향토문화재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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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崔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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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청고(淸高)한 학(學)의 모습 '미수(眉叟) 허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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