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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천군, 제1회 한탄강 문학상 개최
      연천군은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협력업체인 (재)종자와시인박물관과 함께 ‘제1회 한탄강문학상’을 개최한다.   한탄강문학상은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기념하고, 유네스코 2관왕 도시 연천군과 (재)종자와시인박물관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홍보하며, 전국민의 문학 창작의욕 고취 및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지난 8월 16일 박물관 내 복합커뮤니티관에서 사전에 위촉된 한탄강문학상 운영위원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통해 한탄강문학상 운영 규정과 한탄강문학상 집행규칙을 제정하여 문학상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한 바 있다. 문학상의 응모자격, 시상금, 시상시기, 심사방법 등을 심도 있게 논의하여 ‘제1회 한탄강문학상 공모(안)’을 최종 확정했다.   문학상을 총괄할 운영위원장은 신광순 관장이 맡았으며, 연천문인협회 창립 멤버이자, 현 고문인 이돈희 시인이 부위원장에 선출됐으며, 실무를 담당할 사무국장에 장지섭 운영위원을 선임했다. 위원으로는 김석표 연천문인협회 회장, 김태용 참좋은행정사무소 대표행정사, 백인덕 아라문학 주간, 유재복 시인, 이병찬 대진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 이증희 연천예총 지회장, 현종헌 시인, 홍순창 전 군포문인협회 회장 등이 참여했다.   한탄강문학상을 총괄하는 신광순 위원장은“한탄강문학상은 국내 어떤 문학상보다도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여 상의 권위를 높이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며, 문학상 운영을 통해 (재)종자와시인박물관과 연천군의 문학적 위상을 한층 높이고 나아가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홍보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9월 1일부터 30일까지 전국 공모에 들어간 한탄강문학상의 공모분야는 시 분야로 응모자격은 전국의 신인 및 기성 문인들을 대상으로 하며, 응모작은 미발표 순수창작품이어야 한다. 예심과 본심을 거쳐 당선작은 상금 500만원, 우수상은 100만원, 가작은 상금 50만원의 시상금과 상패가 주어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재)종자와시인박물관 홈페이지(www.fspm.co.kr) 공지사항을 참조하면 된다.   문학상을 주최하는 (재)종자와시인박물관은 한탄강 세계지질공원 최고의 지질명소인 재인폭포 인근 연천군 고문리에 위치해 있으며, 2017년 12월 준공하여 2019년 10월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경기도에 등록된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희귀본 고서, 사전, 옛날 교과서, 시집 등이 전시된 시인전시관과 수천 여종의 씨앗 표본들이 전시된 종자전시관 그리고 50기의 시비가 설치된 시비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군 관계자는 “연천 방문의 해 및 유네스코 2관왕 등재를 맞이하여 한탄강문학상 개최를 통해 한탄강과 연천군에 관련하여 새롭게 발굴된 연천의 이야기를 다양한 관광콘텐츠로 활용함으로서 지속가능한 한탄강 지질공원 발전은 물론 연천군을 널리 홍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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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천
    • 문화·예술
    2021-09-03
  • 연천의 영원한 문인 이 돈희 시인 경기시인상 수상
      지난 11월 1일 수원 화성박물관 강당에서는 순수시 문학단체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한국경기시인협회 및 계간 「한국시학」이 개최하는  한국시학상・경기시인상 시상식이 열렸다.  코로나-19 정국으로 모든 활동이 위축되고, 작은 모임조차 갖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주최 측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열정으로 소수의 행사관계자와 수상자 및 가족들만 초청하여 뜻깊은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연천문인의 상징이자 영원한 시인인 이돈희씨가 경기시인상을 수상했다. 주최 측 선정경위에서 밝히기를 ‘경기도 연천 한탄강변에서 성장,  현재까지 거주하며, 1997년 《내일의 시》로 등단하였고, 『한탄강의 노래』 등을 통하여 한민족 분단의 아픔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면서 연천문인협회의 고문인 이돈희 시인은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왕성한 창작욕으로 꾸준한 시작(詩作)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십 수 년 간 한국조류보호협회 지부장을 역임하며 매년 ‘두루미 먹이주기’  행사와 총포나 약물로 인하여 부상당한 새들을 구조하고 보호하는 일에 진력해 옴으로서, 후배 문인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는  진정한 연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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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천
    • 문화·예술
    2020-11-15
  • [칼럼]아! 수레여울(車灘川)
    최병수 연천문인협회 회장   1995년에 발행된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 「지명유래」편에는 수레여울에 대한 유래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수레여울(車灘, 수레울)  : 공굴다리 북쪽, 장진천에 있는 여울. 조선 개국 초 연천읍 현가리 도당골에 은거했던 고려 진사 이양소(李陽昭)를 만나기 위하여 연천으로 친행하던 태종의 어가(御駕)가 이 여울을 건너다 빠졌다하여 ‘수레 여울’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秋雨半晴 人半醉 가을비 멎으면서 반쪽  하늘 개었는데, 사람은 술기운에 반쯤 취했네. 暮雲初捲 月初生 저녁 구름 걷어지며 초저녁달이 떠오르네.위 칠언절구는  1800년대 만들어진 『연천현읍지(漣川縣邑誌)』(서울대 규장각 소장) 「총묘(塚墓)」편 ‘이양소 묘’에 기록된 내용으로, 태종 6년(1406) 연천을 방문한 태종이 고려 말 동문수학한 옛 친구 이양소(李楊昭)를 만나 술을 함께 마시며 주고받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이 때 이양소를 만나기 위하여 거가를 타고 장진천(漳津川)을 건너다 여울에 빠지는데 이 여울이 바로 수레 여울(車灘)이다. 두 사람이 만난 이야기는 조선 영조 때 연천현감을 지낸 신유한(申維翰)의 「청천집(靑泉集)」, 정조 때 홍문관,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을 지낸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 역시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한 포천 출신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조금씩 다르지만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이를 보더라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태종은 조선 건국 후 개경을 등지고 은둔했던 이양소가 거의 15년 만에 자신 앞에 나타나 준 것이 너무 기쁘고 반가웠다. 두 사람은 고려 우왕 8년(1382) 진사시험에 같이 합격한 사마동방(司馬同榜)이면서도 나이도 동갑(정미생. 1367년생)이었다. 곡산 청룡사와 성균관에서 함께 학문을 연마하다가 의기가 투합하면 개경의 기생집도 함께 다닐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역성혁명의 주역으로 조선의 임금이 되고, 한 사람은 불사이군의 마음으로 산속으로 은둔했다. 태종은 다정했던 옛날을 생각하며 술을 가져오라고 해서 이양소에게 술을 내려주며 함께 마시며 이양소에게 연구(聯句)를 짓자고 제의한다. ‘추우반청(秋雨半晴)~’로 시작되는 태종의 연구(聯句)는 새로운 왕조에 하루빨리 동참하라는 의미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양소의 대구(對句), ‘모운초권(暮雲初捲)~ ’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뜻으로 생각되는데,(필자의 짧은 소견임) 이양소는 대구의 마지막 연(聯) ‘월초생(月初生)’을 읊으며 태종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한다. 월초생은 송도(松都)의 유명한 가기(歌妓:노래를 잘 부르는 기생)로 이방원이 젊어서부터 가까이한 행희(幸姬:마음드는 여자, 군주의 첩) 그러나 태종이 권력을 잡은 후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는지 월초생은 일찍 죽었다. 이양소가 대구(帶鉤)에서 월초생을 언급하자, 태종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이양소의 손을 잡고 거가에 오를 것을 명한다. 이양소가 극구 사양하며 오르지 않자, 태종은 그 자리에서 이양소에게 곡산부사직을 제수한다. 이양소는 엎드려 절하며 사례를 올리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헤어져 태종은 한양으로, 이양소는 도당골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양소는 곡산부사로 부임한 지 3일 만에 소를 거꾸로 타고 연천 도당골(현가리)로 돌아와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수레여울(車灘)은 우정, 충절의 의미를 생각게 하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며, 수레여울에서부터 전곡읍 삼형제 바위 앞까지 이어지는 차탄천은 지난 7일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 받은 한탄강의 지천으로서 빼어난 명소이다. 이전에는 차탄천 계곡이 험난하여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비경(祕境)으로 남아 있었으나, 2015년부터 ‘차탄천 에움길’이라는 미명아래 지속적인 파괴가 이루어져 지금은 본래의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근래에는 오폐수차집관로를 설치한다고 굴삭기와 덤프트럭을 동원하여 엄청나게 파괴하더니,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시설물을 설치한다고 대형 굴삭기와  20톤이 넘는 카고 트럭이 드나들며 세계 어느 곳에 가서도 볼 수 없는 경관을 간단없이 망가뜨리고 있다. 아울러 일반인의 무단출입을 방치함으로써, 야영, 낚시꾼들의 쓰레기가 마구 버려져 있어 과연 이 곳이 지질명소인가 개탄의 소리가 절로 난다. 차탄천 지질명소의 많은 부분이 파괴된 공사현장에서 엄청난 중장비의 굉음을 들으면서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공사를 하는 것인지?”, 연천군에 목 놓아 소리쳐 묻고 싶다.  최병수 <연천문인협회 회장>
    • 오피니언
    • 칼럼
    2020-07-23
  • [역사기행]청고(淸高)한 학(學)의 모습 '미수(眉叟) 허 목'
      “세 칸의 띳집이 숲속 그늘에 있었는데 넓은 뜨락 한 모퉁이 뾰족한 돌무더기를 모아 금강산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바위에는 이끼 무늬가 어룽대고 그런 사이에 전서(篆書) 글씨를 새겨 넣으니 제법 예스러운 모습으로 보였다. 방안에는 쓸쓸하게 다른 물건은 없었고, 더부룩한 눈썹에 성긴 수염은 청고(淸高)한 골상(骨相)이 마치 깡마른 학(鶴)의 모습 같았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한 세대 이상 후배이던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1) 는 아버지(崔碩英)가 연천현감으로 근무하던 1665년(현종 6년) 16살의 나이로 당시 71세의 허목을 찾아가서 만났는데 미수의 생전 모습과 사후의 유상(遺像)으로 전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대단한 관찰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허목은 3년 전에 삼척부사직을 사임하고 5대조 허훈(許薰)을 비롯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로 낙향하여 독서와 저술에 힘을 쓰며 십청원(十淸園)과 괴석원(怪石園)을 만들어 도가적인 삶을 살며, ‘청고(淸高)한 학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다가 간 미수 허목.    허목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1595년(선조 28) 한양의 창선방(彰善坊)2)에서 태어나서 68세에 선조들의 고향인 연천에 정착할 때까지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다.   유년시절은 7년 전쟁, 임진왜란의 와중이었고, 15세 부터는 부친의 임지를 따라 20년 가까이 여러 곳을 전전했는가 하면 한창 일할 나이인 32살 때에는 인조(仁祖)로부터 정거(停擧)3)를 당하여 좌절을 겪는데 후에 벌(罰)이 풀렸음에도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란(胡亂)을 겪으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1646년(인조 24) 선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향리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어머니가 의령에서 돌아가시자 연천의 선산에 장례를 치르고 3년 후, 56세에 비로소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고, 내시교관, 조지서 별좌, 공조좌랑, 용궁현감, 지평 등 매년 새로운 벼슬에 제수되고 바로 사임하고 하는 일이 10년 가까이 반복된다. 허목은 왜 그렇게 관직을 맡지 않으려고 했을까? 아마 이것은 증조부 때부터 시작된 불행에 연유한 때문일 것이다.     증조부 허자(許磁;1496~1551)는 문정왕후 시절 문과에 합격하여 박사ㆍ수찬을 거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4)하여 교리ㆍ응교ㆍ검상ㆍ전환 등을 역임한 뒤 이조정랑에 오르는 등 순탄한 관리생활을 이어 나갔다. 명종이 즉위한 이후 호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을 때,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과 함께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제거에 가담,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으로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좌찬성(종1품)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등 영화를 누렸으나 이기(李芑) 등 과 대립하면서 그들의 미움을 받아 함경남도 홍원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박람강기(博覽强記)5)하여 심성이 높고 깨끗하여 이달(利達)6)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아들 허강(許橿:허목의 조부)은 아버지가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홍원으로 귀양 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여막살이를 하는 등 매우 슬퍼하였다. 그 행동거지가 바르고 곧아서 여러 차례 조정으로부터 부름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40년간 강호(江湖)를 방랑하면서 옛사람의 책으로 스스로 즐거움을 찾고 다른 사람과 교유를 사절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 토산에서 피난하던 중 그곳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허목의 아버지 허교(許喬)는 이런 배경에서 성장하여 난중(亂中)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니 25세의 나이에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책임감으로 종9품 군자감 참봉부터 시작하여 여러 미관말직을 거쳐 25년 만에 종6품 거창현감의 자리에 올랐고, 포천현감을 마지막으로 65세로 임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약 40년 동안의 벼슬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평소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까. 평소에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고, 32세 때 자신이 옳다고 행한 일에 대하여 인조(仁祖)가 글공부하는 선비에게 가장 치명적인 벌(罰)인 정거(停擧)의 조치가 내려짐으로서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리고 조부(祖父)처럼 전국을 유랑하며 스승을 찾고, 글공부에 매달렸던 것이다.      1650년(효종 1) 정월 56세의 나이로 비로소 추천(推薦)으로서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자 그의 어머니가 "선인께서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자 그는 수긍하고 관직에 나갔으나 1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651년(효종 2) 10월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임명되었다.  1652년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 정육품 조지서 우두머리 )에 제수되어 상경하였으나 그해 6월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자 사직하고 내려가 부임하지 않았다. 벼슬을 제수하면 바로 사직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63세인 효종 8년(1657) 지평(持平: 사헌부 정오품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1년 만에 장령으로 옮겼고, 현종 즉위하여 사헌부 장령(掌令: 정사품 관직)으로 예(禮)를 간쟁(諫爭)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부사의 자리도 노론의 무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60개월(5년)의 임기도중인 2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허목이 내직(內職)7)이던 외직(外職: 지방관) 이던 임금이 제수하는 직책에 오래 있지 못하고 거듭 사직을 하게 되는 것도 선조(先祖)들의 순탄치 못했던 관직 생활과 아버지의 유훈(遺訓) 등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점차 깊어가는 당쟁의 폐해로 조정의 말단 하리(下吏)까지 노론의 무리로 가득 찬 상황에서 관리로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意志)를 펼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미 효종 시절부터 조정 내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서인들은, 현종 시절 사헌부 장령의 위치에 있던 허목이 제1차 예송논쟁에 밀려 삼척부사로 좌천되어서 10 여년을 연천에서 저술과 독서에만 몰두하다가 숙종의 부름을 받고 대사헌에 임명되어 숙종의 신하로서 궁궐에 출입할 당시의 기록인 《숙종실록(1년~5년)》을 살펴보면 사관들이 편파적이고 주관적으로 사초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록의 주된 내용은 매일 매일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기록한 기사여야 하는데, 당시의 기사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사론(史論)과 같은 논조로 사초를 작성하였고, 사론(史論)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중상모략을 담아 무차별 인신공격을 가하고 있어 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러한 내용이 상당히 많지만 대표적인 내용 하나만 살펴보자. 허목이 소(疎)를 올려 아뢰기를  “전에 직강(直講)을 지낸 이태서(李台瑞)는 문사(文詞)로 이름이 나서 지금 세상에는 이만한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중략) .........허목은 을사년559) 간신 허자(許磁)의 손자로서 그의 어미는 시인(詩人) 임제(林悌)의 딸이었다...............(중략) ........... 허목은 밖으로는 대범하고 명랑한 것 같지마는 속은 실지로 간사하였으며, 눈썹의 길이가 거의 한 치나 되었기에 스스로 미수(眉叟)라고 호를 지었다. 그러나 눈초리가 굽고 눈동자가 분명치 못하였다.  .......... (중략) .......... 허목은 오로지 보복(報復)을 일삼아서 비록 늙고 혼미(昏迷)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그릇되고 잘못됨이 많지마는, 송시열을 공격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앞장섰고, 기관(機關)이 교묘하고 주밀하였다. ...... (하략) ......                                  (숙종 3권, 1년(1675 을묘) 4월 10일 기사)    이날의 기사는 숙종이 보위에 오른 지 채 1년도 안 되는 숙종 1년 4월 10일의 기사로, 허목이 관직에 추천하여 직강(直講)의 자리에 임명된 이태서(李台瑞)가 서인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 일에 책임을 느낀 허목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기사 말미에 ‘사신은 논한다’는 사론(史論)의 전제(前提)도 없이 허황되고 근거 없는 장문(長文)으로 허목을 극렬하게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선조(宣祖) 때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파당(派黨)의 폐해는 이미 온 조정(朝廷)을 덮어 말단 하리(下吏)로 부터 사관(史官)에 이르기 까지 요소요소에 포진한 파당(西人)의 무리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유일하게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허목을 극렬하게 깎아내리고 있다.   미수 허목의 학문적인 연원(淵源)8)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수제자인 허목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근기(近畿)지역으로 옮겨 받아 고학(古學)과 고문(古文)이라는 고경(古經)으로 방향을 틀어 ‘근기(近畿)학파’를 열었고, 조선 후기 3대 학자라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성호(星湖) 이익(李瀷),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라는 걸출한 후학들이 뒤를 이어 학문적 연원을 이룩했다.    허목은 자신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문집을 ‘기언(記言)’이라고 했다. 당시 모두가 ‘문집(文集)’이라 했건만, 선생 자신이 ‘기언(記言)’이라고 정했다. 굳이 문집이라고 하지 않고 기언이라고 한 것은 ‘기언(記言)’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허목은 고서(古書)를 무척 좋아했고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穆篤好古書 老而不怠)” 라는 첫 글귀가 선생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웅변하고 있다. 모두가 성리학에 열중하여 송나라 주자(朱子) 이후의 학문에 경도(傾倒) 되었을 때 선생은 옛글, 최소한 이전의 공맹(孔孟)의 학문만을 좋아해서 늙도록 게으르지 않게 그런 부분만 연구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미수의 상고정신(尙古情神), 즉 옛 것을 숭상하는 마음은 흔히 말하는 복고주의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이우성(李佑成) 교수(1925~2017.한문학자, 국사학자)는 밝혔다.   “고문(古文). 고서(古書)의 ‘고(古)’를 숭상하는 미수의 상고정신은 중세에 대한 부정이며 중세에 대한 부정은 동시에 관념화된 당시의 성리학-주자학 정신 풍토의 부정이다. 주자학적 권위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정점에 도달한 17세기 당시에 그 권위의 구축에 일생의 정력을 바친 송시열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 교수의 주장처럼 주자학적 권위주의를 탈피하려는 변혁의 발단이 바로 미수(眉叟)에게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1, 2, 3차로 이어지는 예송논쟁은 왕권과 신권의 충돌, 또는 단순한 당쟁의 산물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학문적 뒷받침 속에서 허목과 송시열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경쟁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원년(1675) 80세의 나이로 부름을 맞아 1년 동안 5번이나 관직을 옮겨 삼공(三公)에 이르니 81세였다. 14살의 소년왕 숙종은 팔순이 넘은 노신을 극진히 예우하였다. 그러나 경신환국(庚申換局)과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같이 여러 차례 정국을 손바닥 뒤집듯 하여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많은 신하들을 희생시켰다. 허목은 85세에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9)으로 조정에서 남인들이 쫓겨나갈 적에 삭출(削黜)10)을 당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부름을 받지 못하여 88세 되던 해 4월 병이 나서 조석으로 배알하던 선조의 묘를 가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그동안 부탁받은 남의 책 서문, 가장(家狀), 묘문(墓文)과 전서(篆書)를 써달라는 종이를 봉해 돌려주거나 하면서 주변을 정리하며 서제(庶弟)인 달(達)을 시켜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기도록 하였다. 4월 27일 갑진일에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 밖에서 들어와 문안을 여쭙자     “제군(諸君)들 왔는가, 모름지기 잘 있게.”   하고서 조금 있다가 편안히 운명했다. 이때가 4월 27일(甲辰) 인시(寅時)11)였다.    미수 허목은 생전에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숙종은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시독관(侍讀官) 이봉징(李鳳徵)과 승지(承旨) 권환(權瑍)의 건의에 따라 ‘허목(許穆)의 문자를 간인(刊印)토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주(註)1) 최규서(崔奎瑞) : 1650년(효종 1)~1735년(영조 11) 본관은 해주(海州). 시호는 충정(忠貞).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광주(廣州) 출신. 삼당시인으로 꼽히는 최경창(崔慶昌)의 현손이며, 최집(崔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진해(崔振海)이고, 아버지는 현감 최석영(崔碩英)이다. 2) 창선방(彰善坊) :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동부 7방 중의 하나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원남동・인의동・연지동・효제동・종로5・6가 각 일부에 해당된다.3) 정거(停擧) : 조선시대 유생에게 과거 응시자격을 일시적으로 박탈하던 제도. 4)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5) 박람강기(博覽强記) : 여러 가지 책을 널리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함. 6) 이달(利達) : 이익(利益)과 영달(榮達)7) 내직(內職) : 서울에 있는 각 관아의 관직 및 수원 · 광주 · 개성 · 강화의 유수(留守). 경관직(京官職).8) 연원(淵源) : 사물이나 일 따위의 근원(根源).9) 경신대출척 :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        10) 삭출(削黜) : 벼슬을 빼앗고 내쫓음.11) 인시(寅時) : 이십사시(二十四時)의 다섯째 시. 오전 세 시 반부터 오전 네 시 반까지이다.            <연천문인협회 회장>  <연천군 향토문화재 위원>   최병수(崔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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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4
  • [뉴스매거진21 TV]연천문인협회 연천문학 17집 출판기념 및 시낭송회 2부
    (사)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가 주관하는 연천문학(회장 최병수) 제17집 출판기념식과 연천이 낳은 서정시인 월파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낭송회가 30일 오후6시부터 9시까지 전곡읍 참게여울주가에서 회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개최됐다.   이날 1부 행사는 김진일 사무국장의 사회로 개회사, 내빈소개, 연천문학17집 발간 경과보고, 축사, 케익절단 순으로 이어졌다. 2부 행사는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 낭송과 사)연천예총 박봉학 연극협회지부장의 축하판소리공연과 파주.연천의 기타동아리‘7줄’의 포크송 공연이 진행됐다. 3부 행사는 문인들의 작은 음악회와 회원들의 자작시 낭송회를 펼쳤다.   연천문학은 (사)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 회원들의 시, 시조, 소설, 수필, 희곡 등을 담아 매년 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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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3
  • [뉴스매거진21 TV]연천문인협회 연천문학 17집 출판기념 및 시낭송회 1부
    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 연천문학 제17집 출판기념회 및 월파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낭송회 개최(사)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가 주관하는 연천문학(회장 최병수) 제17집 출판기념식과 연천이 낳은 서정시인 월파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낭송회가 지난 31일  오후6시부터 9시까지 전곡읍 참게여울주가에서 회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개최됐다. 이날 1부 행사는 김진일 사무국장의  사회로 개회사, 내빈소개, 연천문학17집 발간 경과보고, 축사, 케익절단 순으로 이어졌다. 2부 행사는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 낭송과  사)연천예총 박봉학 연극협회지부장의 축하판소리공연과 파주.연천의 기타동아리‘일곱줄’의 포크송 공연이 진행됐다. 3부 행사는 문인들의 작은  음악회와 회원들의 자작시 낭송회를 펼쳤다. 연천문학은 (사)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 회원들의 시, 시조, 소설, 수필, 희곡 등을  담아 매년 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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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3
  • [칼럼]해동성군(海東聖君) 세종(世宗)이 가는 길
    조선초기강무장(야외기동훈련장)으로 사용된 가사평의 재현행사 모습 © 최병수  경기북부를 관통하는 3호선은 세종 강무길   국도 3호선은 원래 경남 남해에서 평안북도 초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다. 그 3호선 중,  서울–의정부–양주-동두천–연천–철원– 평강까지 이어지는 길은 세종이 근 20년 가까이 봄, 가을에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행하던 강무의 행로(行路)이다. 세종은 조선의 무비(武備)가 소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재위 32년 중 24년을 추운 겨울날 병사들과 함께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했던 강무(講武)는 과연 무엇일까?     강무는 ‘조선시대 왕이 신하와 백성을 모아놓고 함께 실시하던 사냥 의식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조선시대에는 봄가을에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야외에서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세종을 거쳐 성종대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군례(軍禮)에서는 그 절차와 의식을 강무의(講武儀)로 규정하고 있다. 강무는 사냥을 통한 실전 연습이었다. 사냥은 평상시 국가의 무비(武備)를 닦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였다. 전국의 병력 동원으로부터 강무장까지의 행군, 금고기치(金鼓旗幟)에 의한 군령의 습득, 짐승 몰이를 위한 다양한 진법의 활용, 목표물을 잡기 위한 활쏘기의 연마 등 군령과 군정(軍政)을 한꺼번에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실제로 강무는, 기본적으로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르는 군사들을 동원하는 종합적인 군사훈련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강무는 조선 초기 태조 5년에 정도전의 발의로 시작되었고, 태종대에 강무의(講武儀)가 제정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세종대에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매년 봄, 가을에  실시함으로서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이 개국하고 20년 가까이 어수선했던 정국이 안정되고 사후에 성군(聖君이라고 칭송될 만큼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임금이 궁궐을 떠나 길거리 백성들과 소통하는가 하면 각종 악조건 속에도 군사들을 조련하여 나라의 무비(武備)를 튼튼히 하는 강무의 진정한 의의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강무(講武)는 초기에는 경기도·강원도·황해도·충청도·전라도·평안도 등 전국을 순행하면서 군사를 훈련하는 형태로서 진행되었으며, 지역을 위무(慰撫)하고 전국의 감사들에게 문안을 하게 함으로써 왕 중심의 집권 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 이후 강무는 한양과 가까운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세종의 경우는 양주-연천-철원-평강으로 이어지는 행로를 가장 선호했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많은 강무(講武)를 행한 세종답게 강무에 대한 의지는 신념(信念)으로 가득 찬 것이어서 지속적으로 강무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동서고금의 여러 사례를 들어가며 강하게 몰아 부칠 만큼 감히 꺾을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 군사(軍士)는 자주 조련(操鍊)하여 한서(寒暑)의 고통을 익히고, 기계의 장비를 정하게 하며, 무릇 좌작진퇴(坐作進退)의 절차와 모든 부지런하고 수고로운 일을 미리 연습하여 익숙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가히 군사(軍士)의 일을 알 것이다. “... 원조(元朝)에서 대도(大都)와 상도(上都)를 두고 해마다 순행(巡行)한 것은 한 곳에 편히 앉아 있는 것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고려 태조가 자손에게 유훈(遺訓)하기를, ‘ 서경(西京)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고 하여, 이로써 후세의 자손들이 해마다 내왕하였으며, 또 달달(達達)이 성(城)을 공격할 때에 이기지 아니한 적이 없었던 것은 유목(遊牧)하는 종족(種族)으로써 음식(飮食)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진(女眞)의 풍속도 역시 이와 같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항상 음식으로써 일을 삼으니, 급할 때에 이르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강무(講武)의 시작과 끝     본격적인 강무를 시작하기 전 병조에서는 강무 개시 7일전에 여러 백성을 불러서 사냥하는 법에 따르게 하고 사냥하는 들판을 표시(表示)한다. 그리고 강무장 둘레에 깃발을 꽂고 잡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여 임금과 장졸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강무 당일 이른 아침 강무(講武)를 행할 것을 고(告)하는 제사를 종묘에 지내고, 궁궐을 나서는데 문무백관이 흥인문(興仁門) 밖까지 나와 전송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강무에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부마 및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이 한 사람씩 호종(扈從)을 하고, 규모가 적을 때에는 본궁의 병사 2,500명 정도만 참여하고 많게는 한양 인근의 황해도, 충청도 병사까지 참여하여 15,000명까지 참여하여 약 10일간의 기간으로 평강 분수령 행궁까지 갔다가 포천을 거쳐 양주로 해서 흥인문으로 환궁하는 것이 상례였다.    세종이 세종 원년부터 24년까지 매년 1~2회 실시하였던 강무 기록을 참조하여 약 10여 일 간의 강무행로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첫째 날 – 낮참에 양주 녹양평에 머물다   이날 거가(車駕)가 흥인문을 출발하여 점심참에 양주(楊州) 사천동 어구에 머물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경녕군(敬寧君) 이비(李)·공녕군(恭寧君) 이인(李䄄)·의성군(誼城君) 이용(李㝐)이 입시(入侍)하고, 경기 감사 김겸(金謙)·경력 안숭선(安崇善)·정역 찰방(程驛察訪) 이길배(李吉培)·양질(楊秩)·양주 부사(楊州府使) 이승직(李繩直) 등이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맞아 뵈오니, 거가를 수종하는 당상관(堂上官)에게는 친히 술잔을 내리고, 3품 이하에게도 술을 내리었다. 이로부터 거가가 회정할 때까지 이 예로 하였다. 저녁에 풍천평(楓天平)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머무르니, 경기·충청·전라도의 감사는 말과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고, 평안도 감사는 매[鷹] 3마리를 바치고, 경기 감사는 또 술과 과일을 진상하였다. 조선 초기 강무에 동원된 병력과 기마의 예 실록 상에는 태종대에는 측근(이숙번 등) 2~3명, 갑사(甲士) 500명과 대간, 형조 각 1명 등 대규모 군사훈련이라기보다는 사냥을 떠나는 것과도 같이 단출하게 떠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규모가 커도 5,000명에서 7,000명 미만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세조같은 경우는 구군(驅軍;몰이꾼)이나 기병(騎兵) 외에도 온 조정이 다 따라 나서고, 왕자, 종친들까지 참여하여 2만 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인원이 많고 동원되는 마소(馬牛)의 숫자가 많을수록 몰이꾼들에게 지급할 식량, 장수(將帥)와 갑사(甲士), 병사 등에 지급할 급료, 우마(牛馬)에게 먹일 마초(馬草)의 공급 등 강무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수반되는 어려움으로 문제점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세종 6년(1424) 9월 14일 강무를 떠나기 전 강무 지응사(支應使)가 임금에게 올린  ‘강무할 때의 금령(禁令) 조목’ 을 살펴보면 1. 사복시(司僕寺)의 마필(馬匹)은 들풀이나 곡초를 물론하고 먹일 것.1. 사옹(司饔)·사복(司僕)·충호위(忠扈衛)와 상의원(尙衣院)의 여러 관원들이 각 고을의 공급하는 이민(吏民)을 마음대로 구타하지 못하고, 만약 어기고 그릇된 것이 있으면 대언사(代言司)에 진고(進告)할 것.1. 시위(侍衛) 대소(大小) 군사의 마필을 먹일 건초(乾草)는 각 숙소에 미리 적치(積置)하여 놓고, 비록 부족하더라도 민간에서 거둬들이지 말게 할 것.1. 부득이하여 물이 깊은 곳에 다리 놓는 것 이외에는 도로를 수리하지 말 것.1. 그 도의 감사(監司)·수령관과 경과하는 고을 수령 외의 각 고을 수령들은 지경(地境)을 넘어와서 현신(現身)하지 못하게 할 것.1. 위의 항목에 해당하는 사건 외에 감사나 수령이 민간에서 거둬들여 은밀하게 인정을 쓰는 자는 어가를 따르는 찰방(察訪)이 무시(無時)로 수색하고 체포하여 논죄하게 할 것“  등 총 9개 항목 중 6개 항목이 강무로 인한 민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제정한 금령(禁令)인데 강무의 시행과정을 꼼꼼히 챙기지 않을 경우 강무(講武)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날 – 가사평(袈裟坪)과 불로지산에서 사냥하다  연천(漣川)의 가사평(加士平)과 불로지산(佛老只山:불견산?)에서 몰이하고 낮참으로 연천에서 머무르니, 연천 현감 신회(辛回)가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였다. 오후에 오봉산에서 몰이하고 저녁참에 송절원평에 악차를 배설하니, 경기 감사가 술 50병과 찬(饌)을, 황해도 감사가 방물과 매 3마리와 사냥개 2마리를 바쳤으므로, 거가를 따르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몰이하던 가사평(袈裟坪:가사뜰)은 조선왕조 초기 경기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강무장이다. 도성을 떠나 병사들이 짐승을 몰이하고 임금을 비롯한 장수들과 일반 병사들까지 참여하여 활을 쏘아서 짐승을 잡는 실질적인 강무행사를 개시한 곳이 가사평(袈裟坪)이다. 이날 가사평에서 행해진 강무의 모습을 세종실록 부록에 나오는 강무의(講武儀)에 근거하여 좀 더 자세히 재현해보면 이렇다.    조선왕조 초기, 나라에서 강무장으로 정한 가사평은 평사 시 강무장 안의 초목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며, 사냥도 금하게 하여 드넓은 뜰에 갈대와 잡목이 우거진 들짐승들이 많이 서식하는 군사훈련장 겸 공식 사냥터였다. 이미 병조에서 일주일 전에 금줄을 치고 일반 백성과 잡인의 출입을 금지한 상태였다.         1. 장수의 지휘 하에 몰이꾼(驅軍)들이 몰이한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가사평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조(兵曹)의 하급군관들이 강무를 개시하는 전령(傳令)을 통하여 나누어 알려서, 구군(驅軍: 몰이꾼)들이 에워싸고 사냥을 시작하게 한다. 날짐승의 양 날개와 같이 양익(兩翼)의 장수(將帥)가 모두 기를 세우고 구군(驅軍)들을 지휘하여 에워싸는데 그 앞은 빠뜨린다. 어가(御駕)가 나와서 머물기를 평상시와 같이 한다. 장차 사냥하는 장소에 이르려 하여 어가(御駕)가 북을 치면서 가서 에워싼 데로 들어간다. 유사(有司:행사 총지휘자)가 북을 어가의 앞에 진열하도록 한다. 동남쪽에 있는 사람은 서향하고, 서남쪽에 있는 사람은 동향하여 모두 말을 탄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북을 치면서 가서 에워싼 데 이르고, 이에 몰이하는 기병을 설치한다. 이미 임금께서 말을 타고 남향하면 유사(有司)가 뒤따르고, 대군(大君) 이하의 관원이 모두 말을 타고 궁시(弓矢:활)를 가지고 어가의 앞뒤에 진열한다.   2. 임금이 먼저 활을 쏘고, 왕자, 장수와 군사, 일반 백성의 순서로 사냥   유사가 이에 짐승을 몰이하여 임금의 앞으로 나온다. 처음에 한 번 몰이하여 지나가면, 유사가 궁시를 정돈(整頓)하여 앞으로 나오고, 두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병조에서 궁시를 올리고, 세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임금이 그제야 짐승을 따라 왼편에서 이를 쏜다. 몰이할 적마다 반드시 짐승 세 마리 이상으로 한다. 임금이 화살을 쏜 뒤에야 여러 군(君)들이 화살을 쏘고,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차례로 이를 쏜다. 이를 마치고 몰이하는 기병이 그친 뒤에야 백성들에게 사냥하도록 허락한다.  3. 짐승을 사냥하는 방법   무릇 짐승을 쏠 적에는 왼쪽 어깨 뒤와 넓적다리 앞을 쏘아서 오른쪽 어깻죽지 앞의 살을 관통하는 것을 상(上)의 것으로 삼는데, 건두(乾豆)로 만들어 종묘(宗廟)에 받들며, 오른쪽 귀 부근을 관통하는 것이 이에 다음 가는데, 빈객(賓客)을 접대하며, 왼쪽 넓적다리뼈에서 오른쪽 어깨 뼈 사이로 관통하는 것을 하(下)로 삼는데, 포주(庖廚:푸주 : 소, 돼지 따위를 잡아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일)에 충당한다. 몰이할 때 여러 짐승을 서로 따르는데, 다 죽이지 아니하고, 이미 화살에 맞은 것은 쏘지 아니하며, 또 그 면상(面上)을 쏘지 아니하고, 그 털을 자르지 아니하고, 그것이 표(表) 밖에 나간 것은 쫓지 아니한다.   장차 사냥을 그치려고 하면, 병조에서 기(旗)를 사냥 구역의 안에 세우고는, 이에 어가(御駕)의 북과 여러 장수들의 북을 크게 치면, 사졸(士卒)들이 고함을 치고, 여러 짐승을 잡은 것을 기 아래에 바치면서 그 왼쪽 귀를 올린다. 모아진 짐승 중에 큰 짐승은 관청에 바치고, 작은 짐승은 자기 소유로 한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잡은 짐승을 달려가서 종묘(宗廟)에 올리고, 다음에는 악전(幄殿:임금이 머무는 곳)에서 연회하고 종관(從官)에게 술을 세 순배(巡盃)를 내린다.   4.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  1. 사냥할 때는 여러 장수들이 사졸(士卒)로 하여금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1. 어가(御駕) 앞에 기를 세워서 첨시(瞻視:이리 저리 둘러보아)를 구별하게 하며,   1. 어가 앞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내금위(內禁衛)와 사금(司禁) 이외에, 모든 잡인(雜人)들을 일절 모두 금단(禁斷)하게 하며,   1. 삼군(三軍)이 차례대로 포열(布列)하여 에워싼 속으로 짐승을 모두 몰이하여 들이는데, 빠져 나가는 놈은 군사들이 쫓아가서 화살로 쏘는데, 그 위차(位次:미리 정해진 순서)를 지나면 그치고 쫓지 말게 하며,   1. 모든 잡인들은 에워싼 앞으로 먼저 가게하고, 에워싼 안에서 화살을 쏘고 매와 개를 내놓지 못하게 하며,   1. 무릇 영을 어긴 사람은, 2품 이상의 관원은 계문(啓聞)하여 죄를 과(科)하게 하고, 통정(通政) 이하의 관원은 병조에서 바로 처단하게 하며, 도피(逃避)한 사람은 죄 2등을 더하며, 비록 에워싼 밖이라도, 앞을 다투어 화살을 쏘아서 혹은 사람의 생명을 상해(傷害)하거나, 혹은 개와 말을 상해한 사람은 각각 본률(本律)에 의거하여 시행한다.     세종은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부마 및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등  관리들과 장수와 병사(군관, 기마병, 몰이꾼) 등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거의 매년 한 차례 이상 궁궐을 나와 양주의 녹양평을 거쳐 연천의 가사평, 철원의 갈마재, 평강의 분수령까지 갔다가 귀로에 포천의 보장산과 매장원을 거치는 왕복 600여리의 길을 오가며, 그것도 농번기를 피하느라 아직도 밖에는 날씨가 추운 봄 2월이나 3월, 가을에는 10월이나 11월에 약 15,000명에서 20,000명 가까운 장수와 병사들을 이끌고 빈틈없이 강무(講武)를 실시했다. 따라서 강무 시작단계에서부터 빗발치는 문신들의 반대, 혹독한 날씨, 훈련 중 일어나는 불의의 사고 등, 도성(都城)으로 귀환(歸還)하는 순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만만치 않은 여정(旅程)이었다.    세종 13년(1441) 2월 20일 포천 매장원에서의 강무행사는 혹독한 날씨로 인하여 병사들이 무려 26명, 우마(牛馬)가 70마리나 얼어 죽고,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는 등 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한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때도 세종은 2월 12일 도성을 떠나 2월 13일 연천의 송절원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철원 마산뜰(14일)- 평강 적산(16일)–철원 대야잔(18일)-영평 굴동(19일)에서 강무를 실시하고 영평 보장산 부근인 매장원에서 마지막 강무를 실시하고 도성으로 귀환할 예정이었는데 이런 큰 사고가 난 것이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친 것도 큰 일이거니와 가뜩이나 지병으로 인하여 건강이 여의치 못한 임금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하여 3개월간의 논란 끝에 종국에는 영의정까지 석고대죄하면서 사건을 마무리 짓게 된다.     그 다음 해인 세종 14년(1442) 2월 19일부터 무려 보름 가까이 실시된 춘등(春等) 강무 때에는 짐승을 향해 내관이 쏜 화살이 임금의 막사로 날아들거나(23일), 몰이꾼이 몰던 사슴의 뿔에 받혀 병사 2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났으며, 구군(驅軍:몰이꾼)들이 목을 지키고 있던 순간에 멧돼지가 뛰쳐나와 내구마(內廏馬)를 들이받는 바람에 말이 죽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역대 강무 중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힘든 강무 중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강무 중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불의의 사고를 막기 위해 위와 같은 강무의 절차(節次)와 금령(禁令)을 만들었지만 각처에서 소집된 15,000명 정도의 많은 인원과 기마(騎馬), 활(弓)과 같은 무기 등이 동원되어 야외에서 추운 날씨에 10여일 이상을 행군해가며 하는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보니 가끔 예기치 못한 사고(事故)는 발생했다.   조선 초기 최고의 강무장, 가사평(袈裟坪)  세종 임금이 가장 즐겨 찾았던 조선 최고의 강무장은 연천의 가사평으로서 지금의 전곡읍 은대리와 전곡리, 연천읍 통현리에 걸쳐있는 연천군 제일의 평야 이며 곡창지대로서 점토질 성분으로 된 이곳의 토질이 이른 봄 해빙기나 여름철 우기 때가 되면 인마(人馬)의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질고 미끄러워 예전에 한탄강을 건너서 통현리까지의 20리 벌판길을 통과하자면 기운이 다 빠지고 탈진상태가 되었다는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조선 영조조에 편찬된《輿地圖書, 1757》에는 가사평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전에 어떤 중이 이 벌판을 지나가다 진흙 속에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여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걸음을 옮길 수 없게 되자 입고 있던 가사(袈裟)를 벗어버리고 갔다하여 ‘가사평(袈裟坪)’으로 명명되었다.’ (원문 : 袈裟坪在縣南十里春夏泥滑黏不能着足古有一僧過此氣乏棄其袈裟而去仍名)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연천현 제영(題詠)조에 실린 서거정(徐居正)의 시에는 滑滑春泥怯馬蹄  봄 진흙 미끄러워 말도 가기 어렵구나.楊洲行路互高低 양주서 오는 길 높았다 낮았다 하네.大灘己怕氷猶薄 한 여울을 건널 때 이미 얼음 얇을까 겁냈는데諸嶺辺看雪向齊 여러 영(嶺)을 보니 눈이 아직 그득하구나.破帽輕裘增料峭 헌 모자 얇은 옷은 봄추위 더하는데宦情羈思轉凄迷 환정 나그네 생각 도리어 처량하구나漣州客館依山靜 연천의 객관이 산에 의지해 조용하니攲枕高眠日向西 베개에 기대어 조는 동안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네.        이렇듯 가사평은 아주 찰진 진흙 벌판으로 땅에 물기가 많은 해빙기나 여름 장마철에는 인마의 통행이 아주 힘들었던 곳이다.  습지와 갈대숲, 잡목이 군락을 이루었던 이곳에는 노루, 멧돼지, 꿩을 많은 짐승들이 서식하였고, 땅에 수분이 마르고 건기로 접어드는 11월부터 해동이 되기 전인 2월까지는 말 달리고 사냥을 하면서 군사 조련을 시키는 강무(講武)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기에 조선 초기에 강무장으로 적극 활용이 되었던 곳이다.    저녁에 세종과 그 일행이 묵은 송절원평(松折院坪)은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세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권과 인사권을 틀어지고 강무행사도 태종의 지휘로 행할 적에 세종 1년(1419) 3월 처음으로 세종과 함께 이곳에서 유숙했다. 그 이후부터 세종은 철원 지경(地境)으로 넘어갔다가도 꼭 연천 송절원(松折院) 뜰에 와서 잠을 잘 정도로 이곳을 선호했다. 과연 송절원(松折院)은 어떤 곳이었을까?    지금도 퇴계원, 장호원 등 지명으로나마 흔적이 남아있는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역(驛)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는 역(驛)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송절원과 약 10리(4~5km) 거리에 옥계역(군남면 옥계리)이 있었던 것은 이와 무관(無關)치 않다고 사료된다.    고려 말부터 약 80리(약 32~40km) 거리 마다 설치되었던 역참, 그 역참과 역참 사이를 보완하면서 도적이나 들짐승으로부터 안전하게 공무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숙식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원(院)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 등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면 어디든지 원(院)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는데, 한양 외곽의 이태원, 홍제원, 퇴계원 그리고 경기 남부에 장호원 등《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상세히 기록된 것처럼 전국에 1,300 여 곳의 원이 운영되었다. 송절원(松折院)은 바로 그 원(院) 중에 하나로, 세종이 재위 원년(1418)부터 세종 24년(1442)까지 20 여 년 동안 무려 17 차례나 송절원터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야영(野營)했다는 것은 절대로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세종은 재위 25(1443)년 이후에 송절원(松折院)을 다시 찾지 못하게 된다. 세종의 건강이 궁궐 밖으로 원행(遠行)을 나가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평소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다. 거기다 아버지 태종이 걱정을 할 정도로 운동량이 부족했다. 궁에서 장시간 각종 서책과 씨름하고, 한글 제정과도 같은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하는 일에 매달리다보니 세종 8년 30세 때에 당뇨가 오고, 재위 11년 33세가 되면 구레나룻이 세기 시작했다. 두뇌를 많이 써야 했던 세종으로서는 스트레스로 인한 백발화가 일찍 진행되는데 이때부터 거의 매년 풍질, 어깨부종, 피부병, 두통, 안질, 요도결석, 기력감퇴 등에 관한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각종 질병을 앓게 된다. 그리고 세종 24년 46세 때는 동신언어(動身言語), 즉 몸을 움직이거나 말만 해도 심한 통증을 느끼는 진기한 병을 앓기에 이르렀다. 지금 같으면 한창 왕성하게 일할 장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종 25년(47세)부터는 이미 온몸에 퍼진 각종 질병(疾病)으로 인하여 심신의 고통이 가중되면서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된다.  셋째 날 – 철원 갈말고개에서 몰이하고 저녁에 마산(馬山)에 머물다   철원(鐵原)의 가을마고개(加乙麻古介)에서 몰이하고 낮참으로 진의천(珍衣川)에 머무르니, 부사(府使) 유의(柳議)가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였다. 감사가 술 50병을 올리니, 거가를 따르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미천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몫이 돌아갔다. 저녁에 행차가 마산(馬山)에 머무르니, 감사가 또 청주(淸酒) 1천병과 탁주 2백 동이[盆], 닭 2백 마리, 돼지 52마리를 올렸으므로, 역시 모두 나누어 주고, 주서(注書) 변효경(卞孝敬)을 보내어 사냥한 날짐승을 종묘에 천신(薦新)하게 하였다.    세종 7년 3월 9일부터 시행한 강무(講武) 행사는 첫째 날은 흥인문을 나와 양주 사천현(沙川縣)을 거쳐 풍천평(楓天平)에 야영을 하게 되는데 사천현과 풍천평은 지금의 양주군 은현면 동두천 지역을 말한다. 둘째 날은 가사평과 불로지산에서 몰이하고 오후에도 오봉산에서 사냥하고 송절원에서 야영하고 셋째 날은 강원도 지경으로 넘어가 철원 갈말고개에서 마산(馬山)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 철원 돼지뜰(猪山平)을 거쳐 평강 갑비천(12일) → 장망산(13일) → 행궁이 있는 평강 분수령(14일)을 기점으로 다시 남하하여 철원 풍천역(16일)을 거쳐 대야잔(大也盞 지금의 대마리 부근) → 고석정 → 영평현의 굴동(17일) → 보장산(寶藏山 현재 미군훈련장으로 사용) → 매장원(18일 每場院, 포천현 인근)에서 유숙을 하고 19일 오후에 궁으로 돌아오는 열흘간의 강무는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세종대왕은 찬바람이 부는 벌판에서 야영하며 군사들을 조련시키며 심혈을 기울여 이루고자 했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이 어려 있는 가사평(袈裟坪)과 송절원은 우리군민들이 모두 알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너무나 크나큰 역사ㆍ문화적 자산이다.             연천문인협회 회장          연천군 향토문화재 위원                 최병수(崔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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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8

오피니언 검색결과

  • [칼럼]아! 수레여울(車灘川)
    최병수 연천문인협회 회장   1995년에 발행된 『향토사료집(연천문화원)』 「지명유래」편에는 수레여울에 대한 유래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수레여울(車灘, 수레울)  : 공굴다리 북쪽, 장진천에 있는 여울. 조선 개국 초 연천읍 현가리 도당골에 은거했던 고려 진사 이양소(李陽昭)를 만나기 위하여 연천으로 친행하던 태종의 어가(御駕)가 이 여울을 건너다 빠졌다하여 ‘수레 여울’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秋雨半晴 人半醉 가을비 멎으면서 반쪽  하늘 개었는데, 사람은 술기운에 반쯤 취했네. 暮雲初捲 月初生 저녁 구름 걷어지며 초저녁달이 떠오르네.위 칠언절구는  1800년대 만들어진 『연천현읍지(漣川縣邑誌)』(서울대 규장각 소장) 「총묘(塚墓)」편 ‘이양소 묘’에 기록된 내용으로, 태종 6년(1406) 연천을 방문한 태종이 고려 말 동문수학한 옛 친구 이양소(李楊昭)를 만나 술을 함께 마시며 주고받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이 때 이양소를 만나기 위하여 거가를 타고 장진천(漳津川)을 건너다 여울에 빠지는데 이 여울이 바로 수레 여울(車灘)이다. 두 사람이 만난 이야기는 조선 영조 때 연천현감을 지낸 신유한(申維翰)의 「청천집(靑泉集)」, 정조 때 홍문관,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을 지낸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 역시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한 포천 출신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조금씩 다르지만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이를 보더라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태종은 조선 건국 후 개경을 등지고 은둔했던 이양소가 거의 15년 만에 자신 앞에 나타나 준 것이 너무 기쁘고 반가웠다. 두 사람은 고려 우왕 8년(1382) 진사시험에 같이 합격한 사마동방(司馬同榜)이면서도 나이도 동갑(정미생. 1367년생)이었다. 곡산 청룡사와 성균관에서 함께 학문을 연마하다가 의기가 투합하면 개경의 기생집도 함께 다닐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역성혁명의 주역으로 조선의 임금이 되고, 한 사람은 불사이군의 마음으로 산속으로 은둔했다. 태종은 다정했던 옛날을 생각하며 술을 가져오라고 해서 이양소에게 술을 내려주며 함께 마시며 이양소에게 연구(聯句)를 짓자고 제의한다. ‘추우반청(秋雨半晴)~’로 시작되는 태종의 연구(聯句)는 새로운 왕조에 하루빨리 동참하라는 의미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양소의 대구(對句), ‘모운초권(暮雲初捲)~ ’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뜻으로 생각되는데,(필자의 짧은 소견임) 이양소는 대구의 마지막 연(聯) ‘월초생(月初生)’을 읊으며 태종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한다. 월초생은 송도(松都)의 유명한 가기(歌妓:노래를 잘 부르는 기생)로 이방원이 젊어서부터 가까이한 행희(幸姬:마음드는 여자, 군주의 첩) 그러나 태종이 권력을 잡은 후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는지 월초생은 일찍 죽었다. 이양소가 대구(帶鉤)에서 월초생을 언급하자, 태종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이양소의 손을 잡고 거가에 오를 것을 명한다. 이양소가 극구 사양하며 오르지 않자, 태종은 그 자리에서 이양소에게 곡산부사직을 제수한다. 이양소는 엎드려 절하며 사례를 올리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헤어져 태종은 한양으로, 이양소는 도당골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양소는 곡산부사로 부임한 지 3일 만에 소를 거꾸로 타고 연천 도당골(현가리)로 돌아와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수레여울(車灘)은 우정, 충절의 의미를 생각게 하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며, 수레여울에서부터 전곡읍 삼형제 바위 앞까지 이어지는 차탄천은 지난 7일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 받은 한탄강의 지천으로서 빼어난 명소이다. 이전에는 차탄천 계곡이 험난하여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비경(祕境)으로 남아 있었으나, 2015년부터 ‘차탄천 에움길’이라는 미명아래 지속적인 파괴가 이루어져 지금은 본래의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근래에는 오폐수차집관로를 설치한다고 굴삭기와 덤프트럭을 동원하여 엄청나게 파괴하더니,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시설물을 설치한다고 대형 굴삭기와  20톤이 넘는 카고 트럭이 드나들며 세계 어느 곳에 가서도 볼 수 없는 경관을 간단없이 망가뜨리고 있다. 아울러 일반인의 무단출입을 방치함으로써, 야영, 낚시꾼들의 쓰레기가 마구 버려져 있어 과연 이 곳이 지질명소인가 개탄의 소리가 절로 난다. 차탄천 지질명소의 많은 부분이 파괴된 공사현장에서 엄청난 중장비의 굉음을 들으면서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공사를 하는 것인지?”, 연천군에 목 놓아 소리쳐 묻고 싶다.  최병수 <연천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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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7-23
  • [칼럼]해동성군(海東聖君) 세종(世宗)이 가는 길
    조선초기강무장(야외기동훈련장)으로 사용된 가사평의 재현행사 모습 © 최병수  경기북부를 관통하는 3호선은 세종 강무길   국도 3호선은 원래 경남 남해에서 평안북도 초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다. 그 3호선 중,  서울–의정부–양주-동두천–연천–철원– 평강까지 이어지는 길은 세종이 근 20년 가까이 봄, 가을에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행하던 강무의 행로(行路)이다. 세종은 조선의 무비(武備)가 소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재위 32년 중 24년을 추운 겨울날 병사들과 함께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했던 강무(講武)는 과연 무엇일까?     강무는 ‘조선시대 왕이 신하와 백성을 모아놓고 함께 실시하던 사냥 의식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조선시대에는 봄가을에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야외에서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세종을 거쳐 성종대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군례(軍禮)에서는 그 절차와 의식을 강무의(講武儀)로 규정하고 있다. 강무는 사냥을 통한 실전 연습이었다. 사냥은 평상시 국가의 무비(武備)를 닦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였다. 전국의 병력 동원으로부터 강무장까지의 행군, 금고기치(金鼓旗幟)에 의한 군령의 습득, 짐승 몰이를 위한 다양한 진법의 활용, 목표물을 잡기 위한 활쏘기의 연마 등 군령과 군정(軍政)을 한꺼번에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실제로 강무는, 기본적으로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르는 군사들을 동원하는 종합적인 군사훈련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강무는 조선 초기 태조 5년에 정도전의 발의로 시작되었고, 태종대에 강무의(講武儀)가 제정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세종대에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매년 봄, 가을에  실시함으로서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이 개국하고 20년 가까이 어수선했던 정국이 안정되고 사후에 성군(聖君이라고 칭송될 만큼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임금이 궁궐을 떠나 길거리 백성들과 소통하는가 하면 각종 악조건 속에도 군사들을 조련하여 나라의 무비(武備)를 튼튼히 하는 강무의 진정한 의의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강무(講武)는 초기에는 경기도·강원도·황해도·충청도·전라도·평안도 등 전국을 순행하면서 군사를 훈련하는 형태로서 진행되었으며, 지역을 위무(慰撫)하고 전국의 감사들에게 문안을 하게 함으로써 왕 중심의 집권 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 이후 강무는 한양과 가까운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세종의 경우는 양주-연천-철원-평강으로 이어지는 행로를 가장 선호했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많은 강무(講武)를 행한 세종답게 강무에 대한 의지는 신념(信念)으로 가득 찬 것이어서 지속적으로 강무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동서고금의 여러 사례를 들어가며 강하게 몰아 부칠 만큼 감히 꺾을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 군사(軍士)는 자주 조련(操鍊)하여 한서(寒暑)의 고통을 익히고, 기계의 장비를 정하게 하며, 무릇 좌작진퇴(坐作進退)의 절차와 모든 부지런하고 수고로운 일을 미리 연습하여 익숙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가히 군사(軍士)의 일을 알 것이다. “... 원조(元朝)에서 대도(大都)와 상도(上都)를 두고 해마다 순행(巡行)한 것은 한 곳에 편히 앉아 있는 것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고려 태조가 자손에게 유훈(遺訓)하기를, ‘ 서경(西京)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고 하여, 이로써 후세의 자손들이 해마다 내왕하였으며, 또 달달(達達)이 성(城)을 공격할 때에 이기지 아니한 적이 없었던 것은 유목(遊牧)하는 종족(種族)으로써 음식(飮食)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진(女眞)의 풍속도 역시 이와 같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항상 음식으로써 일을 삼으니, 급할 때에 이르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강무(講武)의 시작과 끝     본격적인 강무를 시작하기 전 병조에서는 강무 개시 7일전에 여러 백성을 불러서 사냥하는 법에 따르게 하고 사냥하는 들판을 표시(表示)한다. 그리고 강무장 둘레에 깃발을 꽂고 잡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여 임금과 장졸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강무 당일 이른 아침 강무(講武)를 행할 것을 고(告)하는 제사를 종묘에 지내고, 궁궐을 나서는데 문무백관이 흥인문(興仁門) 밖까지 나와 전송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강무에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부마 및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이 한 사람씩 호종(扈從)을 하고, 규모가 적을 때에는 본궁의 병사 2,500명 정도만 참여하고 많게는 한양 인근의 황해도, 충청도 병사까지 참여하여 15,000명까지 참여하여 약 10일간의 기간으로 평강 분수령 행궁까지 갔다가 포천을 거쳐 양주로 해서 흥인문으로 환궁하는 것이 상례였다.    세종이 세종 원년부터 24년까지 매년 1~2회 실시하였던 강무 기록을 참조하여 약 10여 일 간의 강무행로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첫째 날 – 낮참에 양주 녹양평에 머물다   이날 거가(車駕)가 흥인문을 출발하여 점심참에 양주(楊州) 사천동 어구에 머물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경녕군(敬寧君) 이비(李)·공녕군(恭寧君) 이인(李䄄)·의성군(誼城君) 이용(李㝐)이 입시(入侍)하고, 경기 감사 김겸(金謙)·경력 안숭선(安崇善)·정역 찰방(程驛察訪) 이길배(李吉培)·양질(楊秩)·양주 부사(楊州府使) 이승직(李繩直) 등이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맞아 뵈오니, 거가를 수종하는 당상관(堂上官)에게는 친히 술잔을 내리고, 3품 이하에게도 술을 내리었다. 이로부터 거가가 회정할 때까지 이 예로 하였다. 저녁에 풍천평(楓天平)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머무르니, 경기·충청·전라도의 감사는 말과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고, 평안도 감사는 매[鷹] 3마리를 바치고, 경기 감사는 또 술과 과일을 진상하였다. 조선 초기 강무에 동원된 병력과 기마의 예 실록 상에는 태종대에는 측근(이숙번 등) 2~3명, 갑사(甲士) 500명과 대간, 형조 각 1명 등 대규모 군사훈련이라기보다는 사냥을 떠나는 것과도 같이 단출하게 떠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규모가 커도 5,000명에서 7,000명 미만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세조같은 경우는 구군(驅軍;몰이꾼)이나 기병(騎兵) 외에도 온 조정이 다 따라 나서고, 왕자, 종친들까지 참여하여 2만 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인원이 많고 동원되는 마소(馬牛)의 숫자가 많을수록 몰이꾼들에게 지급할 식량, 장수(將帥)와 갑사(甲士), 병사 등에 지급할 급료, 우마(牛馬)에게 먹일 마초(馬草)의 공급 등 강무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수반되는 어려움으로 문제점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세종 6년(1424) 9월 14일 강무를 떠나기 전 강무 지응사(支應使)가 임금에게 올린  ‘강무할 때의 금령(禁令) 조목’ 을 살펴보면 1. 사복시(司僕寺)의 마필(馬匹)은 들풀이나 곡초를 물론하고 먹일 것.1. 사옹(司饔)·사복(司僕)·충호위(忠扈衛)와 상의원(尙衣院)의 여러 관원들이 각 고을의 공급하는 이민(吏民)을 마음대로 구타하지 못하고, 만약 어기고 그릇된 것이 있으면 대언사(代言司)에 진고(進告)할 것.1. 시위(侍衛) 대소(大小) 군사의 마필을 먹일 건초(乾草)는 각 숙소에 미리 적치(積置)하여 놓고, 비록 부족하더라도 민간에서 거둬들이지 말게 할 것.1. 부득이하여 물이 깊은 곳에 다리 놓는 것 이외에는 도로를 수리하지 말 것.1. 그 도의 감사(監司)·수령관과 경과하는 고을 수령 외의 각 고을 수령들은 지경(地境)을 넘어와서 현신(現身)하지 못하게 할 것.1. 위의 항목에 해당하는 사건 외에 감사나 수령이 민간에서 거둬들여 은밀하게 인정을 쓰는 자는 어가를 따르는 찰방(察訪)이 무시(無時)로 수색하고 체포하여 논죄하게 할 것“  등 총 9개 항목 중 6개 항목이 강무로 인한 민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제정한 금령(禁令)인데 강무의 시행과정을 꼼꼼히 챙기지 않을 경우 강무(講武)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날 – 가사평(袈裟坪)과 불로지산에서 사냥하다  연천(漣川)의 가사평(加士平)과 불로지산(佛老只山:불견산?)에서 몰이하고 낮참으로 연천에서 머무르니, 연천 현감 신회(辛回)가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였다. 오후에 오봉산에서 몰이하고 저녁참에 송절원평에 악차를 배설하니, 경기 감사가 술 50병과 찬(饌)을, 황해도 감사가 방물과 매 3마리와 사냥개 2마리를 바쳤으므로, 거가를 따르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몰이하던 가사평(袈裟坪:가사뜰)은 조선왕조 초기 경기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강무장이다. 도성을 떠나 병사들이 짐승을 몰이하고 임금을 비롯한 장수들과 일반 병사들까지 참여하여 활을 쏘아서 짐승을 잡는 실질적인 강무행사를 개시한 곳이 가사평(袈裟坪)이다. 이날 가사평에서 행해진 강무의 모습을 세종실록 부록에 나오는 강무의(講武儀)에 근거하여 좀 더 자세히 재현해보면 이렇다.    조선왕조 초기, 나라에서 강무장으로 정한 가사평은 평사 시 강무장 안의 초목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며, 사냥도 금하게 하여 드넓은 뜰에 갈대와 잡목이 우거진 들짐승들이 많이 서식하는 군사훈련장 겸 공식 사냥터였다. 이미 병조에서 일주일 전에 금줄을 치고 일반 백성과 잡인의 출입을 금지한 상태였다.         1. 장수의 지휘 하에 몰이꾼(驅軍)들이 몰이한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가사평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조(兵曹)의 하급군관들이 강무를 개시하는 전령(傳令)을 통하여 나누어 알려서, 구군(驅軍: 몰이꾼)들이 에워싸고 사냥을 시작하게 한다. 날짐승의 양 날개와 같이 양익(兩翼)의 장수(將帥)가 모두 기를 세우고 구군(驅軍)들을 지휘하여 에워싸는데 그 앞은 빠뜨린다. 어가(御駕)가 나와서 머물기를 평상시와 같이 한다. 장차 사냥하는 장소에 이르려 하여 어가(御駕)가 북을 치면서 가서 에워싼 데로 들어간다. 유사(有司:행사 총지휘자)가 북을 어가의 앞에 진열하도록 한다. 동남쪽에 있는 사람은 서향하고, 서남쪽에 있는 사람은 동향하여 모두 말을 탄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북을 치면서 가서 에워싼 데 이르고, 이에 몰이하는 기병을 설치한다. 이미 임금께서 말을 타고 남향하면 유사(有司)가 뒤따르고, 대군(大君) 이하의 관원이 모두 말을 타고 궁시(弓矢:활)를 가지고 어가의 앞뒤에 진열한다.   2. 임금이 먼저 활을 쏘고, 왕자, 장수와 군사, 일반 백성의 순서로 사냥   유사가 이에 짐승을 몰이하여 임금의 앞으로 나온다. 처음에 한 번 몰이하여 지나가면, 유사가 궁시를 정돈(整頓)하여 앞으로 나오고, 두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병조에서 궁시를 올리고, 세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임금이 그제야 짐승을 따라 왼편에서 이를 쏜다. 몰이할 적마다 반드시 짐승 세 마리 이상으로 한다. 임금이 화살을 쏜 뒤에야 여러 군(君)들이 화살을 쏘고,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차례로 이를 쏜다. 이를 마치고 몰이하는 기병이 그친 뒤에야 백성들에게 사냥하도록 허락한다.  3. 짐승을 사냥하는 방법   무릇 짐승을 쏠 적에는 왼쪽 어깨 뒤와 넓적다리 앞을 쏘아서 오른쪽 어깻죽지 앞의 살을 관통하는 것을 상(上)의 것으로 삼는데, 건두(乾豆)로 만들어 종묘(宗廟)에 받들며, 오른쪽 귀 부근을 관통하는 것이 이에 다음 가는데, 빈객(賓客)을 접대하며, 왼쪽 넓적다리뼈에서 오른쪽 어깨 뼈 사이로 관통하는 것을 하(下)로 삼는데, 포주(庖廚:푸주 : 소, 돼지 따위를 잡아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일)에 충당한다. 몰이할 때 여러 짐승을 서로 따르는데, 다 죽이지 아니하고, 이미 화살에 맞은 것은 쏘지 아니하며, 또 그 면상(面上)을 쏘지 아니하고, 그 털을 자르지 아니하고, 그것이 표(表) 밖에 나간 것은 쫓지 아니한다.   장차 사냥을 그치려고 하면, 병조에서 기(旗)를 사냥 구역의 안에 세우고는, 이에 어가(御駕)의 북과 여러 장수들의 북을 크게 치면, 사졸(士卒)들이 고함을 치고, 여러 짐승을 잡은 것을 기 아래에 바치면서 그 왼쪽 귀를 올린다. 모아진 짐승 중에 큰 짐승은 관청에 바치고, 작은 짐승은 자기 소유로 한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잡은 짐승을 달려가서 종묘(宗廟)에 올리고, 다음에는 악전(幄殿:임금이 머무는 곳)에서 연회하고 종관(從官)에게 술을 세 순배(巡盃)를 내린다.   4.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  1. 사냥할 때는 여러 장수들이 사졸(士卒)로 하여금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1. 어가(御駕) 앞에 기를 세워서 첨시(瞻視:이리 저리 둘러보아)를 구별하게 하며,   1. 어가 앞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내금위(內禁衛)와 사금(司禁) 이외에, 모든 잡인(雜人)들을 일절 모두 금단(禁斷)하게 하며,   1. 삼군(三軍)이 차례대로 포열(布列)하여 에워싼 속으로 짐승을 모두 몰이하여 들이는데, 빠져 나가는 놈은 군사들이 쫓아가서 화살로 쏘는데, 그 위차(位次:미리 정해진 순서)를 지나면 그치고 쫓지 말게 하며,   1. 모든 잡인들은 에워싼 앞으로 먼저 가게하고, 에워싼 안에서 화살을 쏘고 매와 개를 내놓지 못하게 하며,   1. 무릇 영을 어긴 사람은, 2품 이상의 관원은 계문(啓聞)하여 죄를 과(科)하게 하고, 통정(通政) 이하의 관원은 병조에서 바로 처단하게 하며, 도피(逃避)한 사람은 죄 2등을 더하며, 비록 에워싼 밖이라도, 앞을 다투어 화살을 쏘아서 혹은 사람의 생명을 상해(傷害)하거나, 혹은 개와 말을 상해한 사람은 각각 본률(本律)에 의거하여 시행한다.     세종은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부마 및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등  관리들과 장수와 병사(군관, 기마병, 몰이꾼) 등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거의 매년 한 차례 이상 궁궐을 나와 양주의 녹양평을 거쳐 연천의 가사평, 철원의 갈마재, 평강의 분수령까지 갔다가 귀로에 포천의 보장산과 매장원을 거치는 왕복 600여리의 길을 오가며, 그것도 농번기를 피하느라 아직도 밖에는 날씨가 추운 봄 2월이나 3월, 가을에는 10월이나 11월에 약 15,000명에서 20,000명 가까운 장수와 병사들을 이끌고 빈틈없이 강무(講武)를 실시했다. 따라서 강무 시작단계에서부터 빗발치는 문신들의 반대, 혹독한 날씨, 훈련 중 일어나는 불의의 사고 등, 도성(都城)으로 귀환(歸還)하는 순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만만치 않은 여정(旅程)이었다.    세종 13년(1441) 2월 20일 포천 매장원에서의 강무행사는 혹독한 날씨로 인하여 병사들이 무려 26명, 우마(牛馬)가 70마리나 얼어 죽고,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는 등 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한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때도 세종은 2월 12일 도성을 떠나 2월 13일 연천의 송절원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철원 마산뜰(14일)- 평강 적산(16일)–철원 대야잔(18일)-영평 굴동(19일)에서 강무를 실시하고 영평 보장산 부근인 매장원에서 마지막 강무를 실시하고 도성으로 귀환할 예정이었는데 이런 큰 사고가 난 것이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친 것도 큰 일이거니와 가뜩이나 지병으로 인하여 건강이 여의치 못한 임금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하여 3개월간의 논란 끝에 종국에는 영의정까지 석고대죄하면서 사건을 마무리 짓게 된다.     그 다음 해인 세종 14년(1442) 2월 19일부터 무려 보름 가까이 실시된 춘등(春等) 강무 때에는 짐승을 향해 내관이 쏜 화살이 임금의 막사로 날아들거나(23일), 몰이꾼이 몰던 사슴의 뿔에 받혀 병사 2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났으며, 구군(驅軍:몰이꾼)들이 목을 지키고 있던 순간에 멧돼지가 뛰쳐나와 내구마(內廏馬)를 들이받는 바람에 말이 죽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역대 강무 중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힘든 강무 중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강무 중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불의의 사고를 막기 위해 위와 같은 강무의 절차(節次)와 금령(禁令)을 만들었지만 각처에서 소집된 15,000명 정도의 많은 인원과 기마(騎馬), 활(弓)과 같은 무기 등이 동원되어 야외에서 추운 날씨에 10여일 이상을 행군해가며 하는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보니 가끔 예기치 못한 사고(事故)는 발생했다.   조선 초기 최고의 강무장, 가사평(袈裟坪)  세종 임금이 가장 즐겨 찾았던 조선 최고의 강무장은 연천의 가사평으로서 지금의 전곡읍 은대리와 전곡리, 연천읍 통현리에 걸쳐있는 연천군 제일의 평야 이며 곡창지대로서 점토질 성분으로 된 이곳의 토질이 이른 봄 해빙기나 여름철 우기 때가 되면 인마(人馬)의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질고 미끄러워 예전에 한탄강을 건너서 통현리까지의 20리 벌판길을 통과하자면 기운이 다 빠지고 탈진상태가 되었다는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조선 영조조에 편찬된《輿地圖書, 1757》에는 가사평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전에 어떤 중이 이 벌판을 지나가다 진흙 속에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여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걸음을 옮길 수 없게 되자 입고 있던 가사(袈裟)를 벗어버리고 갔다하여 ‘가사평(袈裟坪)’으로 명명되었다.’ (원문 : 袈裟坪在縣南十里春夏泥滑黏不能着足古有一僧過此氣乏棄其袈裟而去仍名)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연천현 제영(題詠)조에 실린 서거정(徐居正)의 시에는 滑滑春泥怯馬蹄  봄 진흙 미끄러워 말도 가기 어렵구나.楊洲行路互高低 양주서 오는 길 높았다 낮았다 하네.大灘己怕氷猶薄 한 여울을 건널 때 이미 얼음 얇을까 겁냈는데諸嶺辺看雪向齊 여러 영(嶺)을 보니 눈이 아직 그득하구나.破帽輕裘增料峭 헌 모자 얇은 옷은 봄추위 더하는데宦情羈思轉凄迷 환정 나그네 생각 도리어 처량하구나漣州客館依山靜 연천의 객관이 산에 의지해 조용하니攲枕高眠日向西 베개에 기대어 조는 동안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네.        이렇듯 가사평은 아주 찰진 진흙 벌판으로 땅에 물기가 많은 해빙기나 여름 장마철에는 인마의 통행이 아주 힘들었던 곳이다.  습지와 갈대숲, 잡목이 군락을 이루었던 이곳에는 노루, 멧돼지, 꿩을 많은 짐승들이 서식하였고, 땅에 수분이 마르고 건기로 접어드는 11월부터 해동이 되기 전인 2월까지는 말 달리고 사냥을 하면서 군사 조련을 시키는 강무(講武)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기에 조선 초기에 강무장으로 적극 활용이 되었던 곳이다.    저녁에 세종과 그 일행이 묵은 송절원평(松折院坪)은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세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권과 인사권을 틀어지고 강무행사도 태종의 지휘로 행할 적에 세종 1년(1419) 3월 처음으로 세종과 함께 이곳에서 유숙했다. 그 이후부터 세종은 철원 지경(地境)으로 넘어갔다가도 꼭 연천 송절원(松折院) 뜰에 와서 잠을 잘 정도로 이곳을 선호했다. 과연 송절원(松折院)은 어떤 곳이었을까?    지금도 퇴계원, 장호원 등 지명으로나마 흔적이 남아있는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역(驛)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는 역(驛)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송절원과 약 10리(4~5km) 거리에 옥계역(군남면 옥계리)이 있었던 것은 이와 무관(無關)치 않다고 사료된다.    고려 말부터 약 80리(약 32~40km) 거리 마다 설치되었던 역참, 그 역참과 역참 사이를 보완하면서 도적이나 들짐승으로부터 안전하게 공무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숙식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원(院)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 등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면 어디든지 원(院)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는데, 한양 외곽의 이태원, 홍제원, 퇴계원 그리고 경기 남부에 장호원 등《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상세히 기록된 것처럼 전국에 1,300 여 곳의 원이 운영되었다. 송절원(松折院)은 바로 그 원(院) 중에 하나로, 세종이 재위 원년(1418)부터 세종 24년(1442)까지 20 여 년 동안 무려 17 차례나 송절원터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야영(野營)했다는 것은 절대로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세종은 재위 25(1443)년 이후에 송절원(松折院)을 다시 찾지 못하게 된다. 세종의 건강이 궁궐 밖으로 원행(遠行)을 나가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평소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다. 거기다 아버지 태종이 걱정을 할 정도로 운동량이 부족했다. 궁에서 장시간 각종 서책과 씨름하고, 한글 제정과도 같은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하는 일에 매달리다보니 세종 8년 30세 때에 당뇨가 오고, 재위 11년 33세가 되면 구레나룻이 세기 시작했다. 두뇌를 많이 써야 했던 세종으로서는 스트레스로 인한 백발화가 일찍 진행되는데 이때부터 거의 매년 풍질, 어깨부종, 피부병, 두통, 안질, 요도결석, 기력감퇴 등에 관한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각종 질병을 앓게 된다. 그리고 세종 24년 46세 때는 동신언어(動身言語), 즉 몸을 움직이거나 말만 해도 심한 통증을 느끼는 진기한 병을 앓기에 이르렀다. 지금 같으면 한창 왕성하게 일할 장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종 25년(47세)부터는 이미 온몸에 퍼진 각종 질병(疾病)으로 인하여 심신의 고통이 가중되면서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된다.  셋째 날 – 철원 갈말고개에서 몰이하고 저녁에 마산(馬山)에 머물다   철원(鐵原)의 가을마고개(加乙麻古介)에서 몰이하고 낮참으로 진의천(珍衣川)에 머무르니, 부사(府使) 유의(柳議)가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였다. 감사가 술 50병을 올리니, 거가를 따르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미천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몫이 돌아갔다. 저녁에 행차가 마산(馬山)에 머무르니, 감사가 또 청주(淸酒) 1천병과 탁주 2백 동이[盆], 닭 2백 마리, 돼지 52마리를 올렸으므로, 역시 모두 나누어 주고, 주서(注書) 변효경(卞孝敬)을 보내어 사냥한 날짐승을 종묘에 천신(薦新)하게 하였다.    세종 7년 3월 9일부터 시행한 강무(講武) 행사는 첫째 날은 흥인문을 나와 양주 사천현(沙川縣)을 거쳐 풍천평(楓天平)에 야영을 하게 되는데 사천현과 풍천평은 지금의 양주군 은현면 동두천 지역을 말한다. 둘째 날은 가사평과 불로지산에서 몰이하고 오후에도 오봉산에서 사냥하고 송절원에서 야영하고 셋째 날은 강원도 지경으로 넘어가 철원 갈말고개에서 마산(馬山)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 철원 돼지뜰(猪山平)을 거쳐 평강 갑비천(12일) → 장망산(13일) → 행궁이 있는 평강 분수령(14일)을 기점으로 다시 남하하여 철원 풍천역(16일)을 거쳐 대야잔(大也盞 지금의 대마리 부근) → 고석정 → 영평현의 굴동(17일) → 보장산(寶藏山 현재 미군훈련장으로 사용) → 매장원(18일 每場院, 포천현 인근)에서 유숙을 하고 19일 오후에 궁으로 돌아오는 열흘간의 강무는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세종대왕은 찬바람이 부는 벌판에서 야영하며 군사들을 조련시키며 심혈을 기울여 이루고자 했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이 어려 있는 가사평(袈裟坪)과 송절원은 우리군민들이 모두 알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너무나 크나큰 역사ㆍ문화적 자산이다.             연천문인협회 회장          연천군 향토문화재 위원                 최병수(崔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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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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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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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3

역사·관광 검색결과

  • [역사기행]청고(淸高)한 학(學)의 모습 '미수(眉叟) 허 목'
      “세 칸의 띳집이 숲속 그늘에 있었는데 넓은 뜨락 한 모퉁이 뾰족한 돌무더기를 모아 금강산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바위에는 이끼 무늬가 어룽대고 그런 사이에 전서(篆書) 글씨를 새겨 넣으니 제법 예스러운 모습으로 보였다. 방안에는 쓸쓸하게 다른 물건은 없었고, 더부룩한 눈썹에 성긴 수염은 청고(淸高)한 골상(骨相)이 마치 깡마른 학(鶴)의 모습 같았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한 세대 이상 후배이던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1) 는 아버지(崔碩英)가 연천현감으로 근무하던 1665년(현종 6년) 16살의 나이로 당시 71세의 허목을 찾아가서 만났는데 미수의 생전 모습과 사후의 유상(遺像)으로 전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대단한 관찰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허목은 3년 전에 삼척부사직을 사임하고 5대조 허훈(許薰)을 비롯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로 낙향하여 독서와 저술에 힘을 쓰며 십청원(十淸園)과 괴석원(怪石園)을 만들어 도가적인 삶을 살며, ‘청고(淸高)한 학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다가 간 미수 허목.    허목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1595년(선조 28) 한양의 창선방(彰善坊)2)에서 태어나서 68세에 선조들의 고향인 연천에 정착할 때까지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다.   유년시절은 7년 전쟁, 임진왜란의 와중이었고, 15세 부터는 부친의 임지를 따라 20년 가까이 여러 곳을 전전했는가 하면 한창 일할 나이인 32살 때에는 인조(仁祖)로부터 정거(停擧)3)를 당하여 좌절을 겪는데 후에 벌(罰)이 풀렸음에도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란(胡亂)을 겪으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1646년(인조 24) 선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향리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어머니가 의령에서 돌아가시자 연천의 선산에 장례를 치르고 3년 후, 56세에 비로소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고, 내시교관, 조지서 별좌, 공조좌랑, 용궁현감, 지평 등 매년 새로운 벼슬에 제수되고 바로 사임하고 하는 일이 10년 가까이 반복된다. 허목은 왜 그렇게 관직을 맡지 않으려고 했을까? 아마 이것은 증조부 때부터 시작된 불행에 연유한 때문일 것이다.     증조부 허자(許磁;1496~1551)는 문정왕후 시절 문과에 합격하여 박사ㆍ수찬을 거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4)하여 교리ㆍ응교ㆍ검상ㆍ전환 등을 역임한 뒤 이조정랑에 오르는 등 순탄한 관리생활을 이어 나갔다. 명종이 즉위한 이후 호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을 때,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과 함께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제거에 가담,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으로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좌찬성(종1품)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등 영화를 누렸으나 이기(李芑) 등 과 대립하면서 그들의 미움을 받아 함경남도 홍원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박람강기(博覽强記)5)하여 심성이 높고 깨끗하여 이달(利達)6)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아들 허강(許橿:허목의 조부)은 아버지가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홍원으로 귀양 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여막살이를 하는 등 매우 슬퍼하였다. 그 행동거지가 바르고 곧아서 여러 차례 조정으로부터 부름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40년간 강호(江湖)를 방랑하면서 옛사람의 책으로 스스로 즐거움을 찾고 다른 사람과 교유를 사절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 토산에서 피난하던 중 그곳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허목의 아버지 허교(許喬)는 이런 배경에서 성장하여 난중(亂中)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니 25세의 나이에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책임감으로 종9품 군자감 참봉부터 시작하여 여러 미관말직을 거쳐 25년 만에 종6품 거창현감의 자리에 올랐고, 포천현감을 마지막으로 65세로 임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약 40년 동안의 벼슬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평소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까. 평소에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고, 32세 때 자신이 옳다고 행한 일에 대하여 인조(仁祖)가 글공부하는 선비에게 가장 치명적인 벌(罰)인 정거(停擧)의 조치가 내려짐으로서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리고 조부(祖父)처럼 전국을 유랑하며 스승을 찾고, 글공부에 매달렸던 것이다.      1650년(효종 1) 정월 56세의 나이로 비로소 추천(推薦)으로서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자 그의 어머니가 "선인께서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자 그는 수긍하고 관직에 나갔으나 1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651년(효종 2) 10월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임명되었다.  1652년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 정육품 조지서 우두머리 )에 제수되어 상경하였으나 그해 6월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자 사직하고 내려가 부임하지 않았다. 벼슬을 제수하면 바로 사직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63세인 효종 8년(1657) 지평(持平: 사헌부 정오품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1년 만에 장령으로 옮겼고, 현종 즉위하여 사헌부 장령(掌令: 정사품 관직)으로 예(禮)를 간쟁(諫爭)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부사의 자리도 노론의 무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60개월(5년)의 임기도중인 2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허목이 내직(內職)7)이던 외직(外職: 지방관) 이던 임금이 제수하는 직책에 오래 있지 못하고 거듭 사직을 하게 되는 것도 선조(先祖)들의 순탄치 못했던 관직 생활과 아버지의 유훈(遺訓) 등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점차 깊어가는 당쟁의 폐해로 조정의 말단 하리(下吏)까지 노론의 무리로 가득 찬 상황에서 관리로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意志)를 펼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미 효종 시절부터 조정 내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서인들은, 현종 시절 사헌부 장령의 위치에 있던 허목이 제1차 예송논쟁에 밀려 삼척부사로 좌천되어서 10 여년을 연천에서 저술과 독서에만 몰두하다가 숙종의 부름을 받고 대사헌에 임명되어 숙종의 신하로서 궁궐에 출입할 당시의 기록인 《숙종실록(1년~5년)》을 살펴보면 사관들이 편파적이고 주관적으로 사초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록의 주된 내용은 매일 매일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기록한 기사여야 하는데, 당시의 기사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사론(史論)과 같은 논조로 사초를 작성하였고, 사론(史論)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중상모략을 담아 무차별 인신공격을 가하고 있어 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러한 내용이 상당히 많지만 대표적인 내용 하나만 살펴보자. 허목이 소(疎)를 올려 아뢰기를  “전에 직강(直講)을 지낸 이태서(李台瑞)는 문사(文詞)로 이름이 나서 지금 세상에는 이만한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중략) .........허목은 을사년559) 간신 허자(許磁)의 손자로서 그의 어미는 시인(詩人) 임제(林悌)의 딸이었다...............(중략) ........... 허목은 밖으로는 대범하고 명랑한 것 같지마는 속은 실지로 간사하였으며, 눈썹의 길이가 거의 한 치나 되었기에 스스로 미수(眉叟)라고 호를 지었다. 그러나 눈초리가 굽고 눈동자가 분명치 못하였다.  .......... (중략) .......... 허목은 오로지 보복(報復)을 일삼아서 비록 늙고 혼미(昏迷)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그릇되고 잘못됨이 많지마는, 송시열을 공격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앞장섰고, 기관(機關)이 교묘하고 주밀하였다. ...... (하략) ......                                  (숙종 3권, 1년(1675 을묘) 4월 10일 기사)    이날의 기사는 숙종이 보위에 오른 지 채 1년도 안 되는 숙종 1년 4월 10일의 기사로, 허목이 관직에 추천하여 직강(直講)의 자리에 임명된 이태서(李台瑞)가 서인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 일에 책임을 느낀 허목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기사 말미에 ‘사신은 논한다’는 사론(史論)의 전제(前提)도 없이 허황되고 근거 없는 장문(長文)으로 허목을 극렬하게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선조(宣祖) 때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파당(派黨)의 폐해는 이미 온 조정(朝廷)을 덮어 말단 하리(下吏)로 부터 사관(史官)에 이르기 까지 요소요소에 포진한 파당(西人)의 무리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유일하게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허목을 극렬하게 깎아내리고 있다.   미수 허목의 학문적인 연원(淵源)8)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수제자인 허목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근기(近畿)지역으로 옮겨 받아 고학(古學)과 고문(古文)이라는 고경(古經)으로 방향을 틀어 ‘근기(近畿)학파’를 열었고, 조선 후기 3대 학자라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성호(星湖) 이익(李瀷),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라는 걸출한 후학들이 뒤를 이어 학문적 연원을 이룩했다.    허목은 자신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문집을 ‘기언(記言)’이라고 했다. 당시 모두가 ‘문집(文集)’이라 했건만, 선생 자신이 ‘기언(記言)’이라고 정했다. 굳이 문집이라고 하지 않고 기언이라고 한 것은 ‘기언(記言)’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허목은 고서(古書)를 무척 좋아했고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穆篤好古書 老而不怠)” 라는 첫 글귀가 선생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웅변하고 있다. 모두가 성리학에 열중하여 송나라 주자(朱子) 이후의 학문에 경도(傾倒) 되었을 때 선생은 옛글, 최소한 이전의 공맹(孔孟)의 학문만을 좋아해서 늙도록 게으르지 않게 그런 부분만 연구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미수의 상고정신(尙古情神), 즉 옛 것을 숭상하는 마음은 흔히 말하는 복고주의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이우성(李佑成) 교수(1925~2017.한문학자, 국사학자)는 밝혔다.   “고문(古文). 고서(古書)의 ‘고(古)’를 숭상하는 미수의 상고정신은 중세에 대한 부정이며 중세에 대한 부정은 동시에 관념화된 당시의 성리학-주자학 정신 풍토의 부정이다. 주자학적 권위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정점에 도달한 17세기 당시에 그 권위의 구축에 일생의 정력을 바친 송시열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 교수의 주장처럼 주자학적 권위주의를 탈피하려는 변혁의 발단이 바로 미수(眉叟)에게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1, 2, 3차로 이어지는 예송논쟁은 왕권과 신권의 충돌, 또는 단순한 당쟁의 산물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학문적 뒷받침 속에서 허목과 송시열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경쟁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원년(1675) 80세의 나이로 부름을 맞아 1년 동안 5번이나 관직을 옮겨 삼공(三公)에 이르니 81세였다. 14살의 소년왕 숙종은 팔순이 넘은 노신을 극진히 예우하였다. 그러나 경신환국(庚申換局)과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같이 여러 차례 정국을 손바닥 뒤집듯 하여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많은 신하들을 희생시켰다. 허목은 85세에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9)으로 조정에서 남인들이 쫓겨나갈 적에 삭출(削黜)10)을 당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부름을 받지 못하여 88세 되던 해 4월 병이 나서 조석으로 배알하던 선조의 묘를 가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그동안 부탁받은 남의 책 서문, 가장(家狀), 묘문(墓文)과 전서(篆書)를 써달라는 종이를 봉해 돌려주거나 하면서 주변을 정리하며 서제(庶弟)인 달(達)을 시켜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기도록 하였다. 4월 27일 갑진일에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 밖에서 들어와 문안을 여쭙자     “제군(諸君)들 왔는가, 모름지기 잘 있게.”   하고서 조금 있다가 편안히 운명했다. 이때가 4월 27일(甲辰) 인시(寅時)11)였다.    미수 허목은 생전에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숙종은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시독관(侍讀官) 이봉징(李鳳徵)과 승지(承旨) 권환(權瑍)의 건의에 따라 ‘허목(許穆)의 문자를 간인(刊印)토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주(註)1) 최규서(崔奎瑞) : 1650년(효종 1)~1735년(영조 11) 본관은 해주(海州). 시호는 충정(忠貞).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광주(廣州) 출신. 삼당시인으로 꼽히는 최경창(崔慶昌)의 현손이며, 최집(崔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진해(崔振海)이고, 아버지는 현감 최석영(崔碩英)이다. 2) 창선방(彰善坊) :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동부 7방 중의 하나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원남동・인의동・연지동・효제동・종로5・6가 각 일부에 해당된다.3) 정거(停擧) : 조선시대 유생에게 과거 응시자격을 일시적으로 박탈하던 제도. 4)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5) 박람강기(博覽强記) : 여러 가지 책을 널리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함. 6) 이달(利達) : 이익(利益)과 영달(榮達)7) 내직(內職) : 서울에 있는 각 관아의 관직 및 수원 · 광주 · 개성 · 강화의 유수(留守). 경관직(京官職).8) 연원(淵源) : 사물이나 일 따위의 근원(根源).9) 경신대출척 :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        10) 삭출(削黜) : 벼슬을 빼앗고 내쫓음.11) 인시(寅時) : 이십사시(二十四時)의 다섯째 시. 오전 세 시 반부터 오전 네 시 반까지이다.            <연천문인협회 회장>  <연천군 향토문화재 위원>   최병수(崔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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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4
  • [칼럼]해동성군(海東聖君) 세종(世宗)이 가는 길
    조선초기강무장(야외기동훈련장)으로 사용된 가사평의 재현행사 모습 © 최병수  경기북부를 관통하는 3호선은 세종 강무길   국도 3호선은 원래 경남 남해에서 평안북도 초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다. 그 3호선 중,  서울–의정부–양주-동두천–연천–철원– 평강까지 이어지는 길은 세종이 근 20년 가까이 봄, 가을에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행하던 강무의 행로(行路)이다. 세종은 조선의 무비(武備)가 소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재위 32년 중 24년을 추운 겨울날 병사들과 함께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했던 강무(講武)는 과연 무엇일까?     강무는 ‘조선시대 왕이 신하와 백성을 모아놓고 함께 실시하던 사냥 의식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조선시대에는 봄가을에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야외에서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세종을 거쳐 성종대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군례(軍禮)에서는 그 절차와 의식을 강무의(講武儀)로 규정하고 있다. 강무는 사냥을 통한 실전 연습이었다. 사냥은 평상시 국가의 무비(武備)를 닦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였다. 전국의 병력 동원으로부터 강무장까지의 행군, 금고기치(金鼓旗幟)에 의한 군령의 습득, 짐승 몰이를 위한 다양한 진법의 활용, 목표물을 잡기 위한 활쏘기의 연마 등 군령과 군정(軍政)을 한꺼번에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실제로 강무는, 기본적으로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르는 군사들을 동원하는 종합적인 군사훈련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강무는 조선 초기 태조 5년에 정도전의 발의로 시작되었고, 태종대에 강무의(講武儀)가 제정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세종대에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매년 봄, 가을에  실시함으로서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이 개국하고 20년 가까이 어수선했던 정국이 안정되고 사후에 성군(聖君이라고 칭송될 만큼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임금이 궁궐을 떠나 길거리 백성들과 소통하는가 하면 각종 악조건 속에도 군사들을 조련하여 나라의 무비(武備)를 튼튼히 하는 강무의 진정한 의의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강무(講武)는 초기에는 경기도·강원도·황해도·충청도·전라도·평안도 등 전국을 순행하면서 군사를 훈련하는 형태로서 진행되었으며, 지역을 위무(慰撫)하고 전국의 감사들에게 문안을 하게 함으로써 왕 중심의 집권 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 이후 강무는 한양과 가까운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세종의 경우는 양주-연천-철원-평강으로 이어지는 행로를 가장 선호했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많은 강무(講武)를 행한 세종답게 강무에 대한 의지는 신념(信念)으로 가득 찬 것이어서 지속적으로 강무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동서고금의 여러 사례를 들어가며 강하게 몰아 부칠 만큼 감히 꺾을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 군사(軍士)는 자주 조련(操鍊)하여 한서(寒暑)의 고통을 익히고, 기계의 장비를 정하게 하며, 무릇 좌작진퇴(坐作進退)의 절차와 모든 부지런하고 수고로운 일을 미리 연습하여 익숙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가히 군사(軍士)의 일을 알 것이다. “... 원조(元朝)에서 대도(大都)와 상도(上都)를 두고 해마다 순행(巡行)한 것은 한 곳에 편히 앉아 있는 것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고려 태조가 자손에게 유훈(遺訓)하기를, ‘ 서경(西京)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고 하여, 이로써 후세의 자손들이 해마다 내왕하였으며, 또 달달(達達)이 성(城)을 공격할 때에 이기지 아니한 적이 없었던 것은 유목(遊牧)하는 종족(種族)으로써 음식(飮食)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진(女眞)의 풍속도 역시 이와 같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항상 음식으로써 일을 삼으니, 급할 때에 이르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강무(講武)의 시작과 끝     본격적인 강무를 시작하기 전 병조에서는 강무 개시 7일전에 여러 백성을 불러서 사냥하는 법에 따르게 하고 사냥하는 들판을 표시(表示)한다. 그리고 강무장 둘레에 깃발을 꽂고 잡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여 임금과 장졸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강무 당일 이른 아침 강무(講武)를 행할 것을 고(告)하는 제사를 종묘에 지내고, 궁궐을 나서는데 문무백관이 흥인문(興仁門) 밖까지 나와 전송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강무에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부마 및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이 한 사람씩 호종(扈從)을 하고, 규모가 적을 때에는 본궁의 병사 2,500명 정도만 참여하고 많게는 한양 인근의 황해도, 충청도 병사까지 참여하여 15,000명까지 참여하여 약 10일간의 기간으로 평강 분수령 행궁까지 갔다가 포천을 거쳐 양주로 해서 흥인문으로 환궁하는 것이 상례였다.    세종이 세종 원년부터 24년까지 매년 1~2회 실시하였던 강무 기록을 참조하여 약 10여 일 간의 강무행로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첫째 날 – 낮참에 양주 녹양평에 머물다   이날 거가(車駕)가 흥인문을 출발하여 점심참에 양주(楊州) 사천동 어구에 머물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경녕군(敬寧君) 이비(李)·공녕군(恭寧君) 이인(李䄄)·의성군(誼城君) 이용(李㝐)이 입시(入侍)하고, 경기 감사 김겸(金謙)·경력 안숭선(安崇善)·정역 찰방(程驛察訪) 이길배(李吉培)·양질(楊秩)·양주 부사(楊州府使) 이승직(李繩直) 등이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맞아 뵈오니, 거가를 수종하는 당상관(堂上官)에게는 친히 술잔을 내리고, 3품 이하에게도 술을 내리었다. 이로부터 거가가 회정할 때까지 이 예로 하였다. 저녁에 풍천평(楓天平)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머무르니, 경기·충청·전라도의 감사는 말과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고, 평안도 감사는 매[鷹] 3마리를 바치고, 경기 감사는 또 술과 과일을 진상하였다. 조선 초기 강무에 동원된 병력과 기마의 예 실록 상에는 태종대에는 측근(이숙번 등) 2~3명, 갑사(甲士) 500명과 대간, 형조 각 1명 등 대규모 군사훈련이라기보다는 사냥을 떠나는 것과도 같이 단출하게 떠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규모가 커도 5,000명에서 7,000명 미만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세조같은 경우는 구군(驅軍;몰이꾼)이나 기병(騎兵) 외에도 온 조정이 다 따라 나서고, 왕자, 종친들까지 참여하여 2만 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인원이 많고 동원되는 마소(馬牛)의 숫자가 많을수록 몰이꾼들에게 지급할 식량, 장수(將帥)와 갑사(甲士), 병사 등에 지급할 급료, 우마(牛馬)에게 먹일 마초(馬草)의 공급 등 강무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수반되는 어려움으로 문제점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세종 6년(1424) 9월 14일 강무를 떠나기 전 강무 지응사(支應使)가 임금에게 올린  ‘강무할 때의 금령(禁令) 조목’ 을 살펴보면 1. 사복시(司僕寺)의 마필(馬匹)은 들풀이나 곡초를 물론하고 먹일 것.1. 사옹(司饔)·사복(司僕)·충호위(忠扈衛)와 상의원(尙衣院)의 여러 관원들이 각 고을의 공급하는 이민(吏民)을 마음대로 구타하지 못하고, 만약 어기고 그릇된 것이 있으면 대언사(代言司)에 진고(進告)할 것.1. 시위(侍衛) 대소(大小) 군사의 마필을 먹일 건초(乾草)는 각 숙소에 미리 적치(積置)하여 놓고, 비록 부족하더라도 민간에서 거둬들이지 말게 할 것.1. 부득이하여 물이 깊은 곳에 다리 놓는 것 이외에는 도로를 수리하지 말 것.1. 그 도의 감사(監司)·수령관과 경과하는 고을 수령 외의 각 고을 수령들은 지경(地境)을 넘어와서 현신(現身)하지 못하게 할 것.1. 위의 항목에 해당하는 사건 외에 감사나 수령이 민간에서 거둬들여 은밀하게 인정을 쓰는 자는 어가를 따르는 찰방(察訪)이 무시(無時)로 수색하고 체포하여 논죄하게 할 것“  등 총 9개 항목 중 6개 항목이 강무로 인한 민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제정한 금령(禁令)인데 강무의 시행과정을 꼼꼼히 챙기지 않을 경우 강무(講武)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날 – 가사평(袈裟坪)과 불로지산에서 사냥하다  연천(漣川)의 가사평(加士平)과 불로지산(佛老只山:불견산?)에서 몰이하고 낮참으로 연천에서 머무르니, 연천 현감 신회(辛回)가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였다. 오후에 오봉산에서 몰이하고 저녁참에 송절원평에 악차를 배설하니, 경기 감사가 술 50병과 찬(饌)을, 황해도 감사가 방물과 매 3마리와 사냥개 2마리를 바쳤으므로, 거가를 따르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몰이하던 가사평(袈裟坪:가사뜰)은 조선왕조 초기 경기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강무장이다. 도성을 떠나 병사들이 짐승을 몰이하고 임금을 비롯한 장수들과 일반 병사들까지 참여하여 활을 쏘아서 짐승을 잡는 실질적인 강무행사를 개시한 곳이 가사평(袈裟坪)이다. 이날 가사평에서 행해진 강무의 모습을 세종실록 부록에 나오는 강무의(講武儀)에 근거하여 좀 더 자세히 재현해보면 이렇다.    조선왕조 초기, 나라에서 강무장으로 정한 가사평은 평사 시 강무장 안의 초목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며, 사냥도 금하게 하여 드넓은 뜰에 갈대와 잡목이 우거진 들짐승들이 많이 서식하는 군사훈련장 겸 공식 사냥터였다. 이미 병조에서 일주일 전에 금줄을 치고 일반 백성과 잡인의 출입을 금지한 상태였다.         1. 장수의 지휘 하에 몰이꾼(驅軍)들이 몰이한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가사평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조(兵曹)의 하급군관들이 강무를 개시하는 전령(傳令)을 통하여 나누어 알려서, 구군(驅軍: 몰이꾼)들이 에워싸고 사냥을 시작하게 한다. 날짐승의 양 날개와 같이 양익(兩翼)의 장수(將帥)가 모두 기를 세우고 구군(驅軍)들을 지휘하여 에워싸는데 그 앞은 빠뜨린다. 어가(御駕)가 나와서 머물기를 평상시와 같이 한다. 장차 사냥하는 장소에 이르려 하여 어가(御駕)가 북을 치면서 가서 에워싼 데로 들어간다. 유사(有司:행사 총지휘자)가 북을 어가의 앞에 진열하도록 한다. 동남쪽에 있는 사람은 서향하고, 서남쪽에 있는 사람은 동향하여 모두 말을 탄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북을 치면서 가서 에워싼 데 이르고, 이에 몰이하는 기병을 설치한다. 이미 임금께서 말을 타고 남향하면 유사(有司)가 뒤따르고, 대군(大君) 이하의 관원이 모두 말을 타고 궁시(弓矢:활)를 가지고 어가의 앞뒤에 진열한다.   2. 임금이 먼저 활을 쏘고, 왕자, 장수와 군사, 일반 백성의 순서로 사냥   유사가 이에 짐승을 몰이하여 임금의 앞으로 나온다. 처음에 한 번 몰이하여 지나가면, 유사가 궁시를 정돈(整頓)하여 앞으로 나오고, 두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병조에서 궁시를 올리고, 세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임금이 그제야 짐승을 따라 왼편에서 이를 쏜다. 몰이할 적마다 반드시 짐승 세 마리 이상으로 한다. 임금이 화살을 쏜 뒤에야 여러 군(君)들이 화살을 쏘고,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차례로 이를 쏜다. 이를 마치고 몰이하는 기병이 그친 뒤에야 백성들에게 사냥하도록 허락한다.  3. 짐승을 사냥하는 방법   무릇 짐승을 쏠 적에는 왼쪽 어깨 뒤와 넓적다리 앞을 쏘아서 오른쪽 어깻죽지 앞의 살을 관통하는 것을 상(上)의 것으로 삼는데, 건두(乾豆)로 만들어 종묘(宗廟)에 받들며, 오른쪽 귀 부근을 관통하는 것이 이에 다음 가는데, 빈객(賓客)을 접대하며, 왼쪽 넓적다리뼈에서 오른쪽 어깨 뼈 사이로 관통하는 것을 하(下)로 삼는데, 포주(庖廚:푸주 : 소, 돼지 따위를 잡아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일)에 충당한다. 몰이할 때 여러 짐승을 서로 따르는데, 다 죽이지 아니하고, 이미 화살에 맞은 것은 쏘지 아니하며, 또 그 면상(面上)을 쏘지 아니하고, 그 털을 자르지 아니하고, 그것이 표(表) 밖에 나간 것은 쫓지 아니한다.   장차 사냥을 그치려고 하면, 병조에서 기(旗)를 사냥 구역의 안에 세우고는, 이에 어가(御駕)의 북과 여러 장수들의 북을 크게 치면, 사졸(士卒)들이 고함을 치고, 여러 짐승을 잡은 것을 기 아래에 바치면서 그 왼쪽 귀를 올린다. 모아진 짐승 중에 큰 짐승은 관청에 바치고, 작은 짐승은 자기 소유로 한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잡은 짐승을 달려가서 종묘(宗廟)에 올리고, 다음에는 악전(幄殿:임금이 머무는 곳)에서 연회하고 종관(從官)에게 술을 세 순배(巡盃)를 내린다.   4.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  1. 사냥할 때는 여러 장수들이 사졸(士卒)로 하여금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1. 어가(御駕) 앞에 기를 세워서 첨시(瞻視:이리 저리 둘러보아)를 구별하게 하며,   1. 어가 앞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내금위(內禁衛)와 사금(司禁) 이외에, 모든 잡인(雜人)들을 일절 모두 금단(禁斷)하게 하며,   1. 삼군(三軍)이 차례대로 포열(布列)하여 에워싼 속으로 짐승을 모두 몰이하여 들이는데, 빠져 나가는 놈은 군사들이 쫓아가서 화살로 쏘는데, 그 위차(位次:미리 정해진 순서)를 지나면 그치고 쫓지 말게 하며,   1. 모든 잡인들은 에워싼 앞으로 먼저 가게하고, 에워싼 안에서 화살을 쏘고 매와 개를 내놓지 못하게 하며,   1. 무릇 영을 어긴 사람은, 2품 이상의 관원은 계문(啓聞)하여 죄를 과(科)하게 하고, 통정(通政) 이하의 관원은 병조에서 바로 처단하게 하며, 도피(逃避)한 사람은 죄 2등을 더하며, 비록 에워싼 밖이라도, 앞을 다투어 화살을 쏘아서 혹은 사람의 생명을 상해(傷害)하거나, 혹은 개와 말을 상해한 사람은 각각 본률(本律)에 의거하여 시행한다.     세종은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부마 및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등  관리들과 장수와 병사(군관, 기마병, 몰이꾼) 등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거의 매년 한 차례 이상 궁궐을 나와 양주의 녹양평을 거쳐 연천의 가사평, 철원의 갈마재, 평강의 분수령까지 갔다가 귀로에 포천의 보장산과 매장원을 거치는 왕복 600여리의 길을 오가며, 그것도 농번기를 피하느라 아직도 밖에는 날씨가 추운 봄 2월이나 3월, 가을에는 10월이나 11월에 약 15,000명에서 20,000명 가까운 장수와 병사들을 이끌고 빈틈없이 강무(講武)를 실시했다. 따라서 강무 시작단계에서부터 빗발치는 문신들의 반대, 혹독한 날씨, 훈련 중 일어나는 불의의 사고 등, 도성(都城)으로 귀환(歸還)하는 순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만만치 않은 여정(旅程)이었다.    세종 13년(1441) 2월 20일 포천 매장원에서의 강무행사는 혹독한 날씨로 인하여 병사들이 무려 26명, 우마(牛馬)가 70마리나 얼어 죽고,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는 등 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한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때도 세종은 2월 12일 도성을 떠나 2월 13일 연천의 송절원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철원 마산뜰(14일)- 평강 적산(16일)–철원 대야잔(18일)-영평 굴동(19일)에서 강무를 실시하고 영평 보장산 부근인 매장원에서 마지막 강무를 실시하고 도성으로 귀환할 예정이었는데 이런 큰 사고가 난 것이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친 것도 큰 일이거니와 가뜩이나 지병으로 인하여 건강이 여의치 못한 임금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하여 3개월간의 논란 끝에 종국에는 영의정까지 석고대죄하면서 사건을 마무리 짓게 된다.     그 다음 해인 세종 14년(1442) 2월 19일부터 무려 보름 가까이 실시된 춘등(春等) 강무 때에는 짐승을 향해 내관이 쏜 화살이 임금의 막사로 날아들거나(23일), 몰이꾼이 몰던 사슴의 뿔에 받혀 병사 2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났으며, 구군(驅軍:몰이꾼)들이 목을 지키고 있던 순간에 멧돼지가 뛰쳐나와 내구마(內廏馬)를 들이받는 바람에 말이 죽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역대 강무 중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힘든 강무 중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강무 중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불의의 사고를 막기 위해 위와 같은 강무의 절차(節次)와 금령(禁令)을 만들었지만 각처에서 소집된 15,000명 정도의 많은 인원과 기마(騎馬), 활(弓)과 같은 무기 등이 동원되어 야외에서 추운 날씨에 10여일 이상을 행군해가며 하는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보니 가끔 예기치 못한 사고(事故)는 발생했다.   조선 초기 최고의 강무장, 가사평(袈裟坪)  세종 임금이 가장 즐겨 찾았던 조선 최고의 강무장은 연천의 가사평으로서 지금의 전곡읍 은대리와 전곡리, 연천읍 통현리에 걸쳐있는 연천군 제일의 평야 이며 곡창지대로서 점토질 성분으로 된 이곳의 토질이 이른 봄 해빙기나 여름철 우기 때가 되면 인마(人馬)의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질고 미끄러워 예전에 한탄강을 건너서 통현리까지의 20리 벌판길을 통과하자면 기운이 다 빠지고 탈진상태가 되었다는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조선 영조조에 편찬된《輿地圖書, 1757》에는 가사평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전에 어떤 중이 이 벌판을 지나가다 진흙 속에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여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걸음을 옮길 수 없게 되자 입고 있던 가사(袈裟)를 벗어버리고 갔다하여 ‘가사평(袈裟坪)’으로 명명되었다.’ (원문 : 袈裟坪在縣南十里春夏泥滑黏不能着足古有一僧過此氣乏棄其袈裟而去仍名)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연천현 제영(題詠)조에 실린 서거정(徐居正)의 시에는 滑滑春泥怯馬蹄  봄 진흙 미끄러워 말도 가기 어렵구나.楊洲行路互高低 양주서 오는 길 높았다 낮았다 하네.大灘己怕氷猶薄 한 여울을 건널 때 이미 얼음 얇을까 겁냈는데諸嶺辺看雪向齊 여러 영(嶺)을 보니 눈이 아직 그득하구나.破帽輕裘增料峭 헌 모자 얇은 옷은 봄추위 더하는데宦情羈思轉凄迷 환정 나그네 생각 도리어 처량하구나漣州客館依山靜 연천의 객관이 산에 의지해 조용하니攲枕高眠日向西 베개에 기대어 조는 동안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네.        이렇듯 가사평은 아주 찰진 진흙 벌판으로 땅에 물기가 많은 해빙기나 여름 장마철에는 인마의 통행이 아주 힘들었던 곳이다.  습지와 갈대숲, 잡목이 군락을 이루었던 이곳에는 노루, 멧돼지, 꿩을 많은 짐승들이 서식하였고, 땅에 수분이 마르고 건기로 접어드는 11월부터 해동이 되기 전인 2월까지는 말 달리고 사냥을 하면서 군사 조련을 시키는 강무(講武)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기에 조선 초기에 강무장으로 적극 활용이 되었던 곳이다.    저녁에 세종과 그 일행이 묵은 송절원평(松折院坪)은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세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권과 인사권을 틀어지고 강무행사도 태종의 지휘로 행할 적에 세종 1년(1419) 3월 처음으로 세종과 함께 이곳에서 유숙했다. 그 이후부터 세종은 철원 지경(地境)으로 넘어갔다가도 꼭 연천 송절원(松折院) 뜰에 와서 잠을 잘 정도로 이곳을 선호했다. 과연 송절원(松折院)은 어떤 곳이었을까?    지금도 퇴계원, 장호원 등 지명으로나마 흔적이 남아있는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역(驛)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는 역(驛)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송절원과 약 10리(4~5km) 거리에 옥계역(군남면 옥계리)이 있었던 것은 이와 무관(無關)치 않다고 사료된다.    고려 말부터 약 80리(약 32~40km) 거리 마다 설치되었던 역참, 그 역참과 역참 사이를 보완하면서 도적이나 들짐승으로부터 안전하게 공무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숙식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원(院)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 등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면 어디든지 원(院)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는데, 한양 외곽의 이태원, 홍제원, 퇴계원 그리고 경기 남부에 장호원 등《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상세히 기록된 것처럼 전국에 1,300 여 곳의 원이 운영되었다. 송절원(松折院)은 바로 그 원(院) 중에 하나로, 세종이 재위 원년(1418)부터 세종 24년(1442)까지 20 여 년 동안 무려 17 차례나 송절원터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야영(野營)했다는 것은 절대로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세종은 재위 25(1443)년 이후에 송절원(松折院)을 다시 찾지 못하게 된다. 세종의 건강이 궁궐 밖으로 원행(遠行)을 나가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평소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다. 거기다 아버지 태종이 걱정을 할 정도로 운동량이 부족했다. 궁에서 장시간 각종 서책과 씨름하고, 한글 제정과도 같은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하는 일에 매달리다보니 세종 8년 30세 때에 당뇨가 오고, 재위 11년 33세가 되면 구레나룻이 세기 시작했다. 두뇌를 많이 써야 했던 세종으로서는 스트레스로 인한 백발화가 일찍 진행되는데 이때부터 거의 매년 풍질, 어깨부종, 피부병, 두통, 안질, 요도결석, 기력감퇴 등에 관한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각종 질병을 앓게 된다. 그리고 세종 24년 46세 때는 동신언어(動身言語), 즉 몸을 움직이거나 말만 해도 심한 통증을 느끼는 진기한 병을 앓기에 이르렀다. 지금 같으면 한창 왕성하게 일할 장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종 25년(47세)부터는 이미 온몸에 퍼진 각종 질병(疾病)으로 인하여 심신의 고통이 가중되면서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된다.  셋째 날 – 철원 갈말고개에서 몰이하고 저녁에 마산(馬山)에 머물다   철원(鐵原)의 가을마고개(加乙麻古介)에서 몰이하고 낮참으로 진의천(珍衣川)에 머무르니, 부사(府使) 유의(柳議)가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였다. 감사가 술 50병을 올리니, 거가를 따르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미천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몫이 돌아갔다. 저녁에 행차가 마산(馬山)에 머무르니, 감사가 또 청주(淸酒) 1천병과 탁주 2백 동이[盆], 닭 2백 마리, 돼지 52마리를 올렸으므로, 역시 모두 나누어 주고, 주서(注書) 변효경(卞孝敬)을 보내어 사냥한 날짐승을 종묘에 천신(薦新)하게 하였다.    세종 7년 3월 9일부터 시행한 강무(講武) 행사는 첫째 날은 흥인문을 나와 양주 사천현(沙川縣)을 거쳐 풍천평(楓天平)에 야영을 하게 되는데 사천현과 풍천평은 지금의 양주군 은현면 동두천 지역을 말한다. 둘째 날은 가사평과 불로지산에서 몰이하고 오후에도 오봉산에서 사냥하고 송절원에서 야영하고 셋째 날은 강원도 지경으로 넘어가 철원 갈말고개에서 마산(馬山)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 철원 돼지뜰(猪山平)을 거쳐 평강 갑비천(12일) → 장망산(13일) → 행궁이 있는 평강 분수령(14일)을 기점으로 다시 남하하여 철원 풍천역(16일)을 거쳐 대야잔(大也盞 지금의 대마리 부근) → 고석정 → 영평현의 굴동(17일) → 보장산(寶藏山 현재 미군훈련장으로 사용) → 매장원(18일 每場院, 포천현 인근)에서 유숙을 하고 19일 오후에 궁으로 돌아오는 열흘간의 강무는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세종대왕은 찬바람이 부는 벌판에서 야영하며 군사들을 조련시키며 심혈을 기울여 이루고자 했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이 어려 있는 가사평(袈裟坪)과 송절원은 우리군민들이 모두 알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너무나 크나큰 역사ㆍ문화적 자산이다.             연천문인협회 회장          연천군 향토문화재 위원                 최병수(崔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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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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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매거진21 TV]연천문인협회 연천문학 17집 출판기념 및 시낭송회 2부
    (사)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가 주관하는 연천문학(회장 최병수) 제17집 출판기념식과 연천이 낳은 서정시인 월파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낭송회가 30일 오후6시부터 9시까지 전곡읍 참게여울주가에서 회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개최됐다.   이날 1부 행사는 김진일 사무국장의 사회로 개회사, 내빈소개, 연천문학17집 발간 경과보고, 축사, 케익절단 순으로 이어졌다. 2부 행사는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 낭송과 사)연천예총 박봉학 연극협회지부장의 축하판소리공연과 파주.연천의 기타동아리‘7줄’의 포크송 공연이 진행됐다. 3부 행사는 문인들의 작은 음악회와 회원들의 자작시 낭송회를 펼쳤다.   연천문학은 (사)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 회원들의 시, 시조, 소설, 수필, 희곡 등을 담아 매년 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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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3
  • [뉴스매거진21 TV]연천문인협회 연천문학 17집 출판기념 및 시낭송회 1부
    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 연천문학 제17집 출판기념회 및 월파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낭송회 개최(사)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가 주관하는 연천문학(회장 최병수) 제17집 출판기념식과 연천이 낳은 서정시인 월파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낭송회가 지난 31일  오후6시부터 9시까지 전곡읍 참게여울주가에서 회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개최됐다. 이날 1부 행사는 김진일 사무국장의  사회로 개회사, 내빈소개, 연천문학17집 발간 경과보고, 축사, 케익절단 순으로 이어졌다. 2부 행사는 김상용 시인을 기리는 시 낭송과  사)연천예총 박봉학 연극협회지부장의 축하판소리공연과 파주.연천의 기타동아리‘일곱줄’의 포크송 공연이 진행됐다. 3부 행사는 문인들의 작은  음악회와 회원들의 자작시 낭송회를 펼쳤다. 연천문학은 (사)한국문인협회 연천지부 회원들의 시, 시조, 소설, 수필, 희곡 등을  담아 매년 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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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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