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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 고려미소, 포천 구읍리 거대 석조보살입상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세웠으리라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4.4m 석조보살입상이 포천 군내면 구읍리 구읍천 옆에서 천년을 지켜왔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미륵당(現 용화사 간판) 건물내부가 닫혀 있어 일반인은 볼 수 없다. 구읍천은 포천의 진산(鎭山)인 수원산(水源山)에서 시작해 구읍리를 가로질러 포천군 남북으로 관통하는 포천천과 만난다.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석조보살입상은 화강암 하나로 조성되었고 키가 4.4m이다.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인상이다. 머리에 높은 원통형 보관을 썼고 그 위에 판석으로 보개를 얹었다. 판석은 앞에서 보면 사각형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둥글게 반원형이었다. 보관은 덩굴무늬로 장식했으며 정면 원형 테두리 안에 화불이 새겨져 있다.   커다란 상호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이마 정중앙엔 백호가 있다. 눈썹은 둥그런 곡선으로 풍만해 보이고 눈은 반쯤 지긋이 뜨고 있으며 눈아랫선이 수평으로 직선에 가깝다. 코는 오똑하고 뽀족한 편이며 작은 입은 살포시 다물고 있다. 윗입술 아랫부분이 약간 앞으로 튀어 나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미소 짓고 있다. 광대뼈가 나오고 볼이 약간 들어갔으나 곡선으로 부드럽게 표현했다. 하관이 발달하고 긴 주걱턱 외곽을 원만하게 곡선처리했다. 귀는 길게 어깨까지 흘러 내렸다.   목은 3도가 돌려져 있고 3개의 구술 장식 목걸이가 있고 바로 아래엔 옷고름도 보인다. 옷은 통견으로 양쪽 어깨에서 U자로 가슴 앞으로 흘러내리고 양팔에 걸쳐서 여러 개의 주름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오른손바닥은 가슴 앞에 바깥을 향해 엄지와 제3지·4지를 마주 대고 왼손은 펴서 배 위에 대고 손바닥은 위를 향했다. 하체 중앙에는 허리띠가 비스듬히 대각선을 이루면서 흘러 내린다.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같은 돌로 만든 장방형 대좌 위에 발이 조성되어 있다.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지역주민 남모씨(현 80세, 포천시)는 “한국전쟁 직후 1953년 내가 13살 때 매일 이 곳을 지나 다녔는데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남미륵은 여미륵 좌측(동편)에 30cm정도 떨어져 있었고, 여미륵 어깨높이였으며 가슴폭도 그만큼 비례하여 작았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감쪽같이 남미륵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어서 “남녀미륵이 함께 있는 바람에 전쟁도 일어났다고 하면서 함께 있으면 마을에 안 좋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마을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사람들이 남미륵을 구읍천 건너편에 묻었다. 마을사람들만 알고 절대 외부사람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구읍리에는 해발 285m 청성산(靑城山)이 있으며 이 산 능선에 반월산성이 있다. 미륵당 용화사는 반월산성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포천지역은 궁예가 철원에 처음 도읍을 연 896년경 궁예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반월산성은 궁예가 도읍 철원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산성이었고, 철원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써 궁예정권시기 내내 중요했다.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후 5년이 지난 923년에야 명지성(현 반월산성)장군 성달이 왕건에게 귀부했다. 포천지역 일대가 반왕건·친궁예적 정서가 강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고려통일 후 태조와 광종대를 거치면서 지방호족을 중앙으로 흡수하거나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고려왕권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거대한 석조입상을 조성했으며 지역색 강한 석조불보살입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대 석조입상 중에서 천년의 미소를 지닌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특별했다.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세웠으리라 보존상태도 좋고 균형잡힌 단아한 거대 석조보살입상을 포천 구읍리에서 만날 수 있어서다. 질 좋은 화강암과 숙련된 석공들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결같은 천년의 미소를 만날 수 있었으리. 포천석으로 알려진 포천 화강암은 중생대 쥬라기 화강암으로 현재도 전북 익산, 경남 고창과 함께 대표적 화강암 생산지역이다. 또 포천은 궁예 미륵불 환생을 눈 앞에 보고 좌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던 철원, 곧이어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개성이 가까웠기 때문에 고려왕조는 더욱 더 최고의 석공을 동원해 왕권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거대한 석조보살입상을 세웠으리라. 구읍리 석조보살의 온화하고 후덕한 얼굴과 천년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 당시 포천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사진 위키백과]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정성권]   고려시대 대표적 거대 석조불·보살입상을 다음과 같이 표로 비교해 보았다.  [표 뉴스매거진21. 참고 정성권 '여래형 복식착용 보살상의 등장과 전개(2017)']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10m이상으로 높아서 가까이 서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보아야 한다. 턱이 넓고 이마를 좁게 제작했기 때문에 훨씬 더 높고 더 멀리 보였다. 고려왕조가 황제국을 자칭하면서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위압적이며 괴기하게 조성했을 것이다. 거대 석조입상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교통요지에 조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4.4m 높이로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본존불상,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비슷하다. 보통 장육불(丈六佛)이라고 말한다. 장육(丈六)은 1장(=10척) 6척을 일컬으며 16척 즉 4.8m이다. 관촉사와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비례가 어느 정도 균형을 갖추고 있다.      고려전기 거대 석조보살입상이 경기도 남부지역인 안성, 여주, 이천에서 발견되었지만 경기북부지역은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이 처음이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고, 55년만에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려전기 거대 석조불상입상이 재조명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의 보존상태와 석조물 완성도를 감안할 때 경기도유형문화재로 격상되어야 마땅하리라.
    • 뉴스
    • 포천
    • 문화·예술
    2019-10-02
  • [단독]포천 구읍리 고려 석조보살입상, 방치할 것인가?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 현재 일반인이 볼 수 없어.. 6.25전쟁 직후에도 보호시설없이 논두렁에 서 있던 미륵입상, 어떻게 개인 소유로 되었을까?     관계기관, 지정문화재 등록여부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필요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포천 군내면 구읍리에 높이 4.4m 고려 석조보살입상이 있다. 불교미술 전문가인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정성권박사는 "고려시대 10세기 말기나 11세기 초로 제작연대를 추정한다"고 진단했다. 석조보살 입상이 위치한 주소는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601-1이며, 도로명 주소는 군내면 포천로 1444이다. 현재 포천시 향토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건물 내부가 굳게 닫혀 일반인은 볼 수 없다.     [포천시 향토유적 안내판. 사진 뉴스매거진21]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 현재 내부출입 막아 일반인이 볼 수 없어.. 본지는 1986년 6월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세부내용과 지정 결정과정 관련자료를 포천시에 요청한 결과, 당시 경기도 향토유적지정현황(1986년 6월 현재)을 입수했다. 그 당시 소유자 및 관리자는 개인인 것을 확인했다. 천 년전 만들어진 4.4m 거대 석조보살입상이 구읍천 가까이에 있어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접해 왔을 석조보살입상이 개인소유라는 것에 강한 의문이 든다. 이 거대한 크기의 입상은 천년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고, 그동안 이 거대한 석조보살입상은 미륵보살로 불려왔던 공공의 자산이었고 소중한 지역문화유산이었을 것이다.     6.25전쟁 직후에도 보호시설없이 논두렁에 서 있던 미륵입상, 어떻게 개인 소유로 되었을까?   지역주민 남 모(80. 포천시)씨에 의하면 “6.25 전쟁이 끝나고 1958년인가 1959년에 이 자리에 보호시설이 처음 지어졌다. 그 이전에 아무런 보호시설없이 미륵이 논두렁에 서 있었다. 주민들은 비바람을 막아 보호하려고 포천시 허락을 받아 간이 보호막을 지었고 건립비용은 포천 독지가가 출연했다. 그 후 4, 5차례 증축하면서 지금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지나며 쉽게 볼 수 있는 미륵보살이었던 것이다.   그후 1986년 개인이 포천시 향토유적 소유자 및 관리자로 등록하여 지정되었다. 최근 외부에 공개조차 안 되면서 일반인이  석조보살입상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포천시 향토문화재 제6호 거대 석조보살입상 관리자가 개인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고려시대 거대 석조보살입상 소유자가 어떻게 개인일 수 있는가"하는 합리적인 질문을 누구든지 던질 수 있다. 제6호 포천시 향토유적 소유자 및 관리자로 등록한 지 어언 33년이 흘렀다. 현재의 석조보살입상 소유자 및 관리자가 누구인지를 해당 기관인 포천시가 발벗고 나서서 확인해야 하겠다.    현재 용화사를 관리하고 있는 윤모씨는 "미륵보살이 건물 안에 갇혀 있어 무척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쉽게 친견할 수 있게 미륵보살을 개방하고 이 일대를 문화특구로 정비했으면 좋겠다. 개인 돈이라도 있다면 내가 나서서 그렇게 만들고 싶을 정도다. 포천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너무 무관심하고 지역주민들 역시 여기에 미륵보살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륵당 외부모습. 사진 뉴스매거진21]          현재 석조보살입상이 위치한 해당 토지는 1,076㎡이며, 토지 소유주는 1977년 소유권을 이전 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용화사 간판을 부착한 건물용도가 무엇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현재 내부출입을 막아 일반인이 석조보살입상을 친견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 건물이 전통사찰인지, 기도원인지 아니면 개인용도로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구읍천과 불과 20여미터 거리에 있어 홍수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포천시에 건축물관리대장 발급신청 결과 “해당주소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라는 답변이었다. 이 지역은 생산녹지지역이라서 건축물은 행위제한을 받고 있다.  이 건물의 건축허가여부와 향후 실행계획을 포천시에 정보공개청구 신청했으며 현재 포천시의 공식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관계기관, 지정문화재 등록여부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필요  관계기관인 문화재청, 경기도 그리고 포천시는 고려 석조보살입상이 가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문화재위원회가 조사·심의하게 하고 도지정문화재 등록여부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포천시는 현재의 석조보살입상 소유자 및 관리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여 소유 및 관리관계를 명확하게 밝혀야 하겠다. 그리고 토지소유자와 점유자와 협의해 포천시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문화재청장, 경기도지사, 포천시장이 앞장서 고려 문화유산인 석조보살입상에 대한 보호 및 관리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없이 시급한 일이다. 물론 전문학예사를 확보하는 등 포천시장의 강한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겠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불교미술 전문가 정성권박사는 “반월산성과 궁예미륵불 그리고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포천향교를 하나로 묶어 삼국시대-후삼국-고려시대-조선시대을 잇는 ‘포천역사문화벨트’로 만들고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강원도 철원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궁예 태봉국 도성과 연계해 DMZ와 포천, 철원, 금강산까지 포함한다면 세계 최고의 역사문화관광단지로 통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포천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권고하고 있다.        *관련법규 「건축법 시행령」등 정리 별표1 제4호 제2종 근린생활시설 나목에 의하면 종교집회장에 대한 건축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기도원, 사당이 포함되며, 전통사찰의 경우 「전통사찰의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 전통사찰법 시행령에 따르면 전통사찰지정 신청서를 재산목록 및 부동산 소유를 증명하는 서류와 함께 시·도지사에게 제출하여 지정받도록 명시되어 있다. 건축행위 제한은 포천시 도시계획 조례 별표15에서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문화재를 보존하여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함과 아울러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70조(시·도지정문화재의 지정 및 시·도등록문화재의 등록등)는 2018년 12월 24일 개정, 시행일 2019년 12월 25일    2018년 12월 24일 신설된 제70조 3항과 4항 3항 “시·도지사는 그 관할구역에 있는 문화재로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하거나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지 아니한 유형문화재, 기념물(제2조 제1항 제3호 나목 및 다목은 제외한다) 및 민속문화재 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필요한 것을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다. 4항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재에 대하여 시·도지사에게 시·도지정문화재나 문화재자료(보호물이나 보호구역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로 지정·보존할 것을 권고하거나,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보호할 것을 권고할 수 있다. 이 경우 시·도지사는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화재 지정절차 또는 등록절차를 이행하고 그 결과를 문화재청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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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30
  • 고려미소, 포천 구읍리 거대 석조보살입상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4.4m 석조보살입상이 포천 군내면 구읍리 구읍천 옆에서 천년을 지켜왔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미륵당(現 용화사 간판) 안에 갇혀 있다. 구읍천은 포천의 진산(鎭山)인 수원산(水源山)에서 시작해 구읍리를 가로질러 포천군 남북으로 관통하는 포천천과 만난다.   석조보살입상은 화강암 하나로 조성되었고 키가 4.4m이다.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 있는 인상이다. 머리에 높은 원통형 보관을 썼고 그 위에 사각형 판석인 보개를 얹었다. 보관은 덩굴무늬로 장식했으며 정면 원형 테두리 안에 화불이 새겨져 있다. 커다란 상호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이마 정중앙엔 백호가 있다. 눈썹은 둥그런 곡선으로 풍만해 보이고 눈은 반쯤 지긋이 뜨고 있으며 눈아랫선이 수평으로 직선에 가깝다. 코는 오똑하고 뽀족한 편이며 작은 입은 살포시 다물고 있다. 윗입술 아랫부분이 약간 앞으로 튀어 나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미소 짓고 있다. 광대뼈가 나오고 볼이 약간 들어 갔으나 곡선으로 부드럽게 표현했다. 하관이 발달하고 긴 주걱턱 외곽을 원만하게 곡선처리했다. 귀는 길게 어깨까지 흘러 내렸다. 목은 3도가 돌려져 있고 3개의 구술 장식 목걸이가 있고 바로 아래엔 옷고름도 보인다. 옷은 통견으로 양쪽 어깨에서 U자로 가슴 앞으로 흘러내리고 양팔에 걸쳐서 여러 개의 주름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오른손바닥은 가슴 앞에 바깥을 향해 엄지와 제3지·4지를 마주 대고 왼손은 펴서 배 위에 대고 손바닥은 위를 향했다. 하체 중앙에는 허리띠가 비스듬히 대각선 이루면서 흘러 내린다.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같은 돌로 만든 장방형 대좌 위에 신체와 발이 조성되어 있다.        지역주민 남모씨(현 80세, 포천시) 는 “한국전쟁 직후 1953년 내가 13살 때 매일 이 곳을 지나 다녔는데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에 함께 있었다. 남미륵은 여미륵 좌측(동편)에 30cm정도 떨어져 있었고, 여미륵 어깨높이였으며 가슴폭도 그만큼 비례하여 작았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감쪽같이 남미륵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남모씨는 이어서 “남녀미륵이 함께 있는 바람에 전쟁도 일어났다고 하면서 함께 있으면 마을에 안 좋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마을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사람들이 남미륵을 구읍천 건너편에 묻었다. 마을사람들만 알고 절대 외부사람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1958년인가 1959년에 이 자리에 보호시설이 처음 지어졌다. 그 이전에 아무런 보호시설 없이 미륵이 논두렁에 서 있었다. 비바람을 막아 미륵보살 보호하려고 포천시 허락받고 간이 보호막을 지었고 건립비는 포천 독지가가 출연했다. 그 후 방이 모자라 4, 5차례 증축하면서 지금 모습이 되었다. 용화사를 관리하고 있는 윤모씨는 2017년 6월 미륵당에 본인 이름을 올려 놓았다. 그후 2019년 4월 미륵당 옆에 신당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윤모씨가 2017년 6월 미륵당에 본인 이름을 올려 놓았다는 의미는 건물외벽에 용화사 간판을 부착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미륵불 관리자로 서류상 등록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고려시대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86년 4월 9일 포천시지정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거대 석불입상이 경기도 남부지역, 충청도, 전라도에 걸쳐 분포되어 있어 경기북부 구읍리 거대 석조보살입상은 고려석불 발생 및 계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본다.   구읍리에는 해발 285m 청성산(靑城山)이 있으며 이 산 능선에 반월산성이 있다. 미륵당은 반월산성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포천지역은 궁예가 철원에 처음 도읍을 연 896년경 궁예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반월산성은 궁예가 도읍 철원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산성이었고, 철원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써 궁예정권시기 내내 중요했다.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후 5년이 지난 923년에야 명지성(현 반월산성)장군 성달이 왕건에게 귀부했다. 포천지역 일대가 반왕건·친궁예적 정서가 강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륵신앙은 6세기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에 널리 알려졌고 통일신라이후 더욱 발전하여 통일신라 말기엔 궁예가 미륵을 자처하기도 했다. 마을마다 미륵이라 불리는 돌부처가 없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민중 속에 깊이 파고 들었던 신앙이다. 미륵보살이 인간 세상에 나와 용화수 밑에서 성불하고 새로운 세상인 용화세계를 약속한다는 신앙이다. 혼란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주었고 혁명의 길로 인도하기도 했다.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고려통일 후 태조와 광종대를 거치면서 지방호족을 중앙으로 흡수하거나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고려왕권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거대석불을 조성했다. 통일신라시대 왕실불교가 통일신라 말기를 지나 고려시대 민간에 널리 확산되면서 미륵신앙, 관음신앙, 지장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지장이 지옥의 중생을, 미륵이 내세의 중생을 구제해 주는 보살이라면 관음보살은 현세의 고통을 없애주는 보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역마다 석조불상을 조성하려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양질의 화강암과 숙련된 석공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균형이 맞지 않고 조악하나 지역색이 강한 거대 석조불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불상 사진. 위키백과]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경기도문화재총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의 미소를 지닌 구읍리 석조보살입상만은 예외였다. 보존상태도 좋고 균형 잡힌 단아한 거대 석조보살입상을 포천 구읍리에서 지금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질 좋은 화강암과 숙련된 석공들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결같은 천년의 미소를 만날 수 있었으리. 포천석으로 알려진 포천 화강암은 중생대 쥬라기 화강암으로 현재도 전북 익산, 경남 고창과 함께 대표적 화강암 생산지역이다. 또 포천은 궁예 미륵불 환생을 눈 앞에 보고 좌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던 철원, 곧이어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개성이 가까웠기 때문에 고려왕조는 더욱 더 최고의 석공을 동원해 왕권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거대한 석조보살입상을 세웠으리라.   구읍리 석조보살의 온화한 얼굴과 천년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그 당시 포천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300여년 지나 고려후기 수월관음도로 불리는 고려불화의 원형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학계에서 연구할 과제로 남겨야겠다. 최근 문이 굳게 닫혀 있어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을 일반인이 친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고려시대 대표적 거대 석조불보살입상을 다음과 같이 표로 비교해 보았다.         [표. 뉴스매거진21]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을 제외하면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본존불상과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거의 비슷한 크기다. 고려전기 거대 석조입상이 경기도 남부지역인 안성, 여주, 이천에서 발견되었지만 경기북부지역은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이 처음이다. 또 보존상태와 석조물 완성도를 감안한다면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경기도유형문화재로 격상되어야 마땅하다. 포천시와 경기도문화재연구원이 앞장서서 심도있는 연구를 당장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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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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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 고려미소, 포천 구읍리 거대 석조보살입상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세웠으리라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4.4m 석조보살입상이 포천 군내면 구읍리 구읍천 옆에서 천년을 지켜왔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미륵당(現 용화사 간판) 건물내부가 닫혀 있어 일반인은 볼 수 없다. 구읍천은 포천의 진산(鎭山)인 수원산(水源山)에서 시작해 구읍리를 가로질러 포천군 남북으로 관통하는 포천천과 만난다.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석조보살입상은 화강암 하나로 조성되었고 키가 4.4m이다.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인상이다. 머리에 높은 원통형 보관을 썼고 그 위에 판석으로 보개를 얹었다. 판석은 앞에서 보면 사각형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둥글게 반원형이었다. 보관은 덩굴무늬로 장식했으며 정면 원형 테두리 안에 화불이 새겨져 있다.   커다란 상호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이마 정중앙엔 백호가 있다. 눈썹은 둥그런 곡선으로 풍만해 보이고 눈은 반쯤 지긋이 뜨고 있으며 눈아랫선이 수평으로 직선에 가깝다. 코는 오똑하고 뽀족한 편이며 작은 입은 살포시 다물고 있다. 윗입술 아랫부분이 약간 앞으로 튀어 나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미소 짓고 있다. 광대뼈가 나오고 볼이 약간 들어갔으나 곡선으로 부드럽게 표현했다. 하관이 발달하고 긴 주걱턱 외곽을 원만하게 곡선처리했다. 귀는 길게 어깨까지 흘러 내렸다.   목은 3도가 돌려져 있고 3개의 구술 장식 목걸이가 있고 바로 아래엔 옷고름도 보인다. 옷은 통견으로 양쪽 어깨에서 U자로 가슴 앞으로 흘러내리고 양팔에 걸쳐서 여러 개의 주름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오른손바닥은 가슴 앞에 바깥을 향해 엄지와 제3지·4지를 마주 대고 왼손은 펴서 배 위에 대고 손바닥은 위를 향했다. 하체 중앙에는 허리띠가 비스듬히 대각선을 이루면서 흘러 내린다.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같은 돌로 만든 장방형 대좌 위에 발이 조성되어 있다.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지역주민 남모씨(현 80세, 포천시)는 “한국전쟁 직후 1953년 내가 13살 때 매일 이 곳을 지나 다녔는데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남미륵은 여미륵 좌측(동편)에 30cm정도 떨어져 있었고, 여미륵 어깨높이였으며 가슴폭도 그만큼 비례하여 작았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감쪽같이 남미륵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어서 “남녀미륵이 함께 있는 바람에 전쟁도 일어났다고 하면서 함께 있으면 마을에 안 좋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마을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사람들이 남미륵을 구읍천 건너편에 묻었다. 마을사람들만 알고 절대 외부사람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구읍리에는 해발 285m 청성산(靑城山)이 있으며 이 산 능선에 반월산성이 있다. 미륵당 용화사는 반월산성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포천지역은 궁예가 철원에 처음 도읍을 연 896년경 궁예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반월산성은 궁예가 도읍 철원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산성이었고, 철원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써 궁예정권시기 내내 중요했다.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후 5년이 지난 923년에야 명지성(현 반월산성)장군 성달이 왕건에게 귀부했다. 포천지역 일대가 반왕건·친궁예적 정서가 강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고려통일 후 태조와 광종대를 거치면서 지방호족을 중앙으로 흡수하거나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고려왕권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거대한 석조입상을 조성했으며 지역색 강한 석조불보살입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대 석조입상 중에서 천년의 미소를 지닌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특별했다.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세웠으리라 보존상태도 좋고 균형잡힌 단아한 거대 석조보살입상을 포천 구읍리에서 만날 수 있어서다. 질 좋은 화강암과 숙련된 석공들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결같은 천년의 미소를 만날 수 있었으리. 포천석으로 알려진 포천 화강암은 중생대 쥬라기 화강암으로 현재도 전북 익산, 경남 고창과 함께 대표적 화강암 생산지역이다. 또 포천은 궁예 미륵불 환생을 눈 앞에 보고 좌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던 철원, 곧이어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개성이 가까웠기 때문에 고려왕조는 더욱 더 최고의 석공을 동원해 왕권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거대한 석조보살입상을 세웠으리라. 구읍리 석조보살의 온화하고 후덕한 얼굴과 천년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 당시 포천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사진 위키백과]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정성권]   고려시대 대표적 거대 석조불·보살입상을 다음과 같이 표로 비교해 보았다.  [표 뉴스매거진21. 참고 정성권 '여래형 복식착용 보살상의 등장과 전개(2017)']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10m이상으로 높아서 가까이 서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보아야 한다. 턱이 넓고 이마를 좁게 제작했기 때문에 훨씬 더 높고 더 멀리 보였다. 고려왕조가 황제국을 자칭하면서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위압적이며 괴기하게 조성했을 것이다. 거대 석조입상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교통요지에 조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4.4m 높이로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본존불상,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비슷하다. 보통 장육불(丈六佛)이라고 말한다. 장육(丈六)은 1장(=10척) 6척을 일컬으며 16척 즉 4.8m이다. 관촉사와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비례가 어느 정도 균형을 갖추고 있다.      고려전기 거대 석조보살입상이 경기도 남부지역인 안성, 여주, 이천에서 발견되었지만 경기북부지역은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이 처음이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고, 55년만에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려전기 거대 석조불상입상이 재조명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의 보존상태와 석조물 완성도를 감안할 때 경기도유형문화재로 격상되어야 마땅하리라.
    • 뉴스
    • 포천
    • 문화·예술
    2019-10-02
  • [단독]포천 구읍리 고려 석조보살입상, 방치할 것인가?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 현재 일반인이 볼 수 없어.. 6.25전쟁 직후에도 보호시설없이 논두렁에 서 있던 미륵입상, 어떻게 개인 소유로 되었을까?     관계기관, 지정문화재 등록여부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필요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포천 군내면 구읍리에 높이 4.4m 고려 석조보살입상이 있다. 불교미술 전문가인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정성권박사는 "고려시대 10세기 말기나 11세기 초로 제작연대를 추정한다"고 진단했다. 석조보살 입상이 위치한 주소는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601-1이며, 도로명 주소는 군내면 포천로 1444이다. 현재 포천시 향토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건물 내부가 굳게 닫혀 일반인은 볼 수 없다.     [포천시 향토유적 안내판. 사진 뉴스매거진21]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 현재 내부출입 막아 일반인이 볼 수 없어.. 본지는 1986년 6월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세부내용과 지정 결정과정 관련자료를 포천시에 요청한 결과, 당시 경기도 향토유적지정현황(1986년 6월 현재)을 입수했다. 그 당시 소유자 및 관리자는 개인인 것을 확인했다. 천 년전 만들어진 4.4m 거대 석조보살입상이 구읍천 가까이에 있어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접해 왔을 석조보살입상이 개인소유라는 것에 강한 의문이 든다. 이 거대한 크기의 입상은 천년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고, 그동안 이 거대한 석조보살입상은 미륵보살로 불려왔던 공공의 자산이었고 소중한 지역문화유산이었을 것이다.     6.25전쟁 직후에도 보호시설없이 논두렁에 서 있던 미륵입상, 어떻게 개인 소유로 되었을까?   지역주민 남 모(80. 포천시)씨에 의하면 “6.25 전쟁이 끝나고 1958년인가 1959년에 이 자리에 보호시설이 처음 지어졌다. 그 이전에 아무런 보호시설없이 미륵이 논두렁에 서 있었다. 주민들은 비바람을 막아 보호하려고 포천시 허락을 받아 간이 보호막을 지었고 건립비용은 포천 독지가가 출연했다. 그 후 4, 5차례 증축하면서 지금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지나며 쉽게 볼 수 있는 미륵보살이었던 것이다.   그후 1986년 개인이 포천시 향토유적 소유자 및 관리자로 등록하여 지정되었다. 최근 외부에 공개조차 안 되면서 일반인이  석조보살입상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포천시 향토문화재 제6호 거대 석조보살입상 관리자가 개인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고려시대 거대 석조보살입상 소유자가 어떻게 개인일 수 있는가"하는 합리적인 질문을 누구든지 던질 수 있다. 제6호 포천시 향토유적 소유자 및 관리자로 등록한 지 어언 33년이 흘렀다. 현재의 석조보살입상 소유자 및 관리자가 누구인지를 해당 기관인 포천시가 발벗고 나서서 확인해야 하겠다.    현재 용화사를 관리하고 있는 윤모씨는 "미륵보살이 건물 안에 갇혀 있어 무척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쉽게 친견할 수 있게 미륵보살을 개방하고 이 일대를 문화특구로 정비했으면 좋겠다. 개인 돈이라도 있다면 내가 나서서 그렇게 만들고 싶을 정도다. 포천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너무 무관심하고 지역주민들 역시 여기에 미륵보살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륵당 외부모습. 사진 뉴스매거진21]          현재 석조보살입상이 위치한 해당 토지는 1,076㎡이며, 토지 소유주는 1977년 소유권을 이전 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용화사 간판을 부착한 건물용도가 무엇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현재 내부출입을 막아 일반인이 석조보살입상을 친견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 건물이 전통사찰인지, 기도원인지 아니면 개인용도로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구읍천과 불과 20여미터 거리에 있어 홍수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포천시에 건축물관리대장 발급신청 결과 “해당주소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라는 답변이었다. 이 지역은 생산녹지지역이라서 건축물은 행위제한을 받고 있다.  이 건물의 건축허가여부와 향후 실행계획을 포천시에 정보공개청구 신청했으며 현재 포천시의 공식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관계기관, 지정문화재 등록여부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필요  관계기관인 문화재청, 경기도 그리고 포천시는 고려 석조보살입상이 가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문화재위원회가 조사·심의하게 하고 도지정문화재 등록여부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포천시는 현재의 석조보살입상 소유자 및 관리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여 소유 및 관리관계를 명확하게 밝혀야 하겠다. 그리고 토지소유자와 점유자와 협의해 포천시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문화재청장, 경기도지사, 포천시장이 앞장서 고려 문화유산인 석조보살입상에 대한 보호 및 관리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없이 시급한 일이다. 물론 전문학예사를 확보하는 등 포천시장의 강한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겠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불교미술 전문가 정성권박사는 “반월산성과 궁예미륵불 그리고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포천향교를 하나로 묶어 삼국시대-후삼국-고려시대-조선시대을 잇는 ‘포천역사문화벨트’로 만들고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강원도 철원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궁예 태봉국 도성과 연계해 DMZ와 포천, 철원, 금강산까지 포함한다면 세계 최고의 역사문화관광단지로 통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포천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권고하고 있다.        *관련법규 「건축법 시행령」등 정리 별표1 제4호 제2종 근린생활시설 나목에 의하면 종교집회장에 대한 건축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기도원, 사당이 포함되며, 전통사찰의 경우 「전통사찰의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 전통사찰법 시행령에 따르면 전통사찰지정 신청서를 재산목록 및 부동산 소유를 증명하는 서류와 함께 시·도지사에게 제출하여 지정받도록 명시되어 있다. 건축행위 제한은 포천시 도시계획 조례 별표15에서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문화재를 보존하여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함과 아울러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70조(시·도지정문화재의 지정 및 시·도등록문화재의 등록등)는 2018년 12월 24일 개정, 시행일 2019년 12월 25일    2018년 12월 24일 신설된 제70조 3항과 4항 3항 “시·도지사는 그 관할구역에 있는 문화재로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하거나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지 아니한 유형문화재, 기념물(제2조 제1항 제3호 나목 및 다목은 제외한다) 및 민속문화재 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필요한 것을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다. 4항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재에 대하여 시·도지사에게 시·도지정문화재나 문화재자료(보호물이나 보호구역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로 지정·보존할 것을 권고하거나,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보호할 것을 권고할 수 있다. 이 경우 시·도지사는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화재 지정절차 또는 등록절차를 이행하고 그 결과를 문화재청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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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예술
    2019-09-30

역사·관광 검색결과

  • 천년 고려미소, 포천 구읍리 거대 석조보살입상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세웠으리라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4.4m 석조보살입상이 포천 군내면 구읍리 구읍천 옆에서 천년을 지켜왔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미륵당(現 용화사 간판) 건물내부가 닫혀 있어 일반인은 볼 수 없다. 구읍천은 포천의 진산(鎭山)인 수원산(水源山)에서 시작해 구읍리를 가로질러 포천군 남북으로 관통하는 포천천과 만난다.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석조보살입상은 화강암 하나로 조성되었고 키가 4.4m이다.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인상이다. 머리에 높은 원통형 보관을 썼고 그 위에 판석으로 보개를 얹었다. 판석은 앞에서 보면 사각형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둥글게 반원형이었다. 보관은 덩굴무늬로 장식했으며 정면 원형 테두리 안에 화불이 새겨져 있다.   커다란 상호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이마 정중앙엔 백호가 있다. 눈썹은 둥그런 곡선으로 풍만해 보이고 눈은 반쯤 지긋이 뜨고 있으며 눈아랫선이 수평으로 직선에 가깝다. 코는 오똑하고 뽀족한 편이며 작은 입은 살포시 다물고 있다. 윗입술 아랫부분이 약간 앞으로 튀어 나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미소 짓고 있다. 광대뼈가 나오고 볼이 약간 들어갔으나 곡선으로 부드럽게 표현했다. 하관이 발달하고 긴 주걱턱 외곽을 원만하게 곡선처리했다. 귀는 길게 어깨까지 흘러 내렸다.   목은 3도가 돌려져 있고 3개의 구술 장식 목걸이가 있고 바로 아래엔 옷고름도 보인다. 옷은 통견으로 양쪽 어깨에서 U자로 가슴 앞으로 흘러내리고 양팔에 걸쳐서 여러 개의 주름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오른손바닥은 가슴 앞에 바깥을 향해 엄지와 제3지·4지를 마주 대고 왼손은 펴서 배 위에 대고 손바닥은 위를 향했다. 하체 중앙에는 허리띠가 비스듬히 대각선을 이루면서 흘러 내린다.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같은 돌로 만든 장방형 대좌 위에 발이 조성되어 있다.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지역주민 남모씨(현 80세, 포천시)는 “한국전쟁 직후 1953년 내가 13살 때 매일 이 곳을 지나 다녔는데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남미륵은 여미륵 좌측(동편)에 30cm정도 떨어져 있었고, 여미륵 어깨높이였으며 가슴폭도 그만큼 비례하여 작았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감쪽같이 남미륵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어서 “남녀미륵이 함께 있는 바람에 전쟁도 일어났다고 하면서 함께 있으면 마을에 안 좋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마을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사람들이 남미륵을 구읍천 건너편에 묻었다. 마을사람들만 알고 절대 외부사람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구읍리에는 해발 285m 청성산(靑城山)이 있으며 이 산 능선에 반월산성이 있다. 미륵당 용화사는 반월산성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포천지역은 궁예가 철원에 처음 도읍을 연 896년경 궁예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반월산성은 궁예가 도읍 철원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산성이었고, 철원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써 궁예정권시기 내내 중요했다.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후 5년이 지난 923년에야 명지성(현 반월산성)장군 성달이 왕건에게 귀부했다. 포천지역 일대가 반왕건·친궁예적 정서가 강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고려통일 후 태조와 광종대를 거치면서 지방호족을 중앙으로 흡수하거나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고려왕권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거대한 석조입상을 조성했으며 지역색 강한 석조불보살입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대 석조입상 중에서 천년의 미소를 지닌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특별했다.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세웠으리라 보존상태도 좋고 균형잡힌 단아한 거대 석조보살입상을 포천 구읍리에서 만날 수 있어서다. 질 좋은 화강암과 숙련된 석공들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결같은 천년의 미소를 만날 수 있었으리. 포천석으로 알려진 포천 화강암은 중생대 쥬라기 화강암으로 현재도 전북 익산, 경남 고창과 함께 대표적 화강암 생산지역이다. 또 포천은 궁예 미륵불 환생을 눈 앞에 보고 좌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던 철원, 곧이어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개성이 가까웠기 때문에 고려왕조는 더욱 더 최고의 석공을 동원해 왕권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거대한 석조보살입상을 세웠으리라. 구읍리 석조보살의 온화하고 후덕한 얼굴과 천년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 당시 포천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사진 위키백과]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정성권]   고려시대 대표적 거대 석조불·보살입상을 다음과 같이 표로 비교해 보았다.  [표 뉴스매거진21. 참고 정성권 '여래형 복식착용 보살상의 등장과 전개(2017)']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10m이상으로 높아서 가까이 서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보아야 한다. 턱이 넓고 이마를 좁게 제작했기 때문에 훨씬 더 높고 더 멀리 보였다. 고려왕조가 황제국을 자칭하면서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위압적이며 괴기하게 조성했을 것이다. 거대 석조입상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교통요지에 조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4.4m 높이로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본존불상,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비슷하다. 보통 장육불(丈六佛)이라고 말한다. 장육(丈六)은 1장(=10척) 6척을 일컬으며 16척 즉 4.8m이다. 관촉사와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비례가 어느 정도 균형을 갖추고 있다.      고려전기 거대 석조보살입상이 경기도 남부지역인 안성, 여주, 이천에서 발견되었지만 경기북부지역은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이 처음이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고, 55년만에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려전기 거대 석조불상입상이 재조명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의 보존상태와 석조물 완성도를 감안할 때 경기도유형문화재로 격상되어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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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02
  • [단독]포천 구읍리 고려 석조보살입상, 방치할 것인가?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 현재 일반인이 볼 수 없어.. 6.25전쟁 직후에도 보호시설없이 논두렁에 서 있던 미륵입상, 어떻게 개인 소유로 되었을까?     관계기관, 지정문화재 등록여부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필요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포천 군내면 구읍리에 높이 4.4m 고려 석조보살입상이 있다. 불교미술 전문가인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정성권박사는 "고려시대 10세기 말기나 11세기 초로 제작연대를 추정한다"고 진단했다. 석조보살 입상이 위치한 주소는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601-1이며, 도로명 주소는 군내면 포천로 1444이다. 현재 포천시 향토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건물 내부가 굳게 닫혀 일반인은 볼 수 없다.     [포천시 향토유적 안내판. 사진 뉴스매거진21]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 현재 내부출입 막아 일반인이 볼 수 없어.. 본지는 1986년 6월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세부내용과 지정 결정과정 관련자료를 포천시에 요청한 결과, 당시 경기도 향토유적지정현황(1986년 6월 현재)을 입수했다. 그 당시 소유자 및 관리자는 개인인 것을 확인했다. 천 년전 만들어진 4.4m 거대 석조보살입상이 구읍천 가까이에 있어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접해 왔을 석조보살입상이 개인소유라는 것에 강한 의문이 든다. 이 거대한 크기의 입상은 천년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고, 그동안 이 거대한 석조보살입상은 미륵보살로 불려왔던 공공의 자산이었고 소중한 지역문화유산이었을 것이다.     6.25전쟁 직후에도 보호시설없이 논두렁에 서 있던 미륵입상, 어떻게 개인 소유로 되었을까?   지역주민 남 모(80. 포천시)씨에 의하면 “6.25 전쟁이 끝나고 1958년인가 1959년에 이 자리에 보호시설이 처음 지어졌다. 그 이전에 아무런 보호시설없이 미륵이 논두렁에 서 있었다. 주민들은 비바람을 막아 보호하려고 포천시 허락을 받아 간이 보호막을 지었고 건립비용은 포천 독지가가 출연했다. 그 후 4, 5차례 증축하면서 지금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지나며 쉽게 볼 수 있는 미륵보살이었던 것이다.   그후 1986년 개인이 포천시 향토유적 소유자 및 관리자로 등록하여 지정되었다. 최근 외부에 공개조차 안 되면서 일반인이  석조보살입상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포천시 향토문화재 제6호 거대 석조보살입상 관리자가 개인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고려시대 거대 석조보살입상 소유자가 어떻게 개인일 수 있는가"하는 합리적인 질문을 누구든지 던질 수 있다. 제6호 포천시 향토유적 소유자 및 관리자로 등록한 지 어언 33년이 흘렀다. 현재의 석조보살입상 소유자 및 관리자가 누구인지를 해당 기관인 포천시가 발벗고 나서서 확인해야 하겠다.    현재 용화사를 관리하고 있는 윤모씨는 "미륵보살이 건물 안에 갇혀 있어 무척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쉽게 친견할 수 있게 미륵보살을 개방하고 이 일대를 문화특구로 정비했으면 좋겠다. 개인 돈이라도 있다면 내가 나서서 그렇게 만들고 싶을 정도다. 포천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너무 무관심하고 지역주민들 역시 여기에 미륵보살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륵당 외부모습. 사진 뉴스매거진21]          현재 석조보살입상이 위치한 해당 토지는 1,076㎡이며, 토지 소유주는 1977년 소유권을 이전 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용화사 간판을 부착한 건물용도가 무엇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현재 내부출입을 막아 일반인이 석조보살입상을 친견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 건물이 전통사찰인지, 기도원인지 아니면 개인용도로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구읍천과 불과 20여미터 거리에 있어 홍수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포천시에 건축물관리대장 발급신청 결과 “해당주소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라는 답변이었다. 이 지역은 생산녹지지역이라서 건축물은 행위제한을 받고 있다.  이 건물의 건축허가여부와 향후 실행계획을 포천시에 정보공개청구 신청했으며 현재 포천시의 공식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관계기관, 지정문화재 등록여부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필요  관계기관인 문화재청, 경기도 그리고 포천시는 고려 석조보살입상이 가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문화재위원회가 조사·심의하게 하고 도지정문화재 등록여부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포천시는 현재의 석조보살입상 소유자 및 관리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여 소유 및 관리관계를 명확하게 밝혀야 하겠다. 그리고 토지소유자와 점유자와 협의해 포천시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문화재청장, 경기도지사, 포천시장이 앞장서 고려 문화유산인 석조보살입상에 대한 보호 및 관리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없이 시급한 일이다. 물론 전문학예사를 확보하는 등 포천시장의 강한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겠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불교미술 전문가 정성권박사는 “반월산성과 궁예미륵불 그리고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포천향교를 하나로 묶어 삼국시대-후삼국-고려시대-조선시대을 잇는 ‘포천역사문화벨트’로 만들고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강원도 철원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궁예 태봉국 도성과 연계해 DMZ와 포천, 철원, 금강산까지 포함한다면 세계 최고의 역사문화관광단지로 통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포천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권고하고 있다.        *관련법규 「건축법 시행령」등 정리 별표1 제4호 제2종 근린생활시설 나목에 의하면 종교집회장에 대한 건축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기도원, 사당이 포함되며, 전통사찰의 경우 「전통사찰의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 전통사찰법 시행령에 따르면 전통사찰지정 신청서를 재산목록 및 부동산 소유를 증명하는 서류와 함께 시·도지사에게 제출하여 지정받도록 명시되어 있다. 건축행위 제한은 포천시 도시계획 조례 별표15에서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문화재를 보존하여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함과 아울러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70조(시·도지정문화재의 지정 및 시·도등록문화재의 등록등)는 2018년 12월 24일 개정, 시행일 2019년 12월 25일    2018년 12월 24일 신설된 제70조 3항과 4항 3항 “시·도지사는 그 관할구역에 있는 문화재로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하거나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지 아니한 유형문화재, 기념물(제2조 제1항 제3호 나목 및 다목은 제외한다) 및 민속문화재 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필요한 것을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다. 4항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재에 대하여 시·도지사에게 시·도지정문화재나 문화재자료(보호물이나 보호구역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로 지정·보존할 것을 권고하거나,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보호할 것을 권고할 수 있다. 이 경우 시·도지사는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화재 지정절차 또는 등록절차를 이행하고 그 결과를 문화재청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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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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