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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 회암사지, 문화재청 세계유산 연구지원 사업 공모 선정
      양주시(시장 이성호)는 양주 회암사지가 문화재청에서 실시한 ‘세계유산 잠정목록 연구지원 사업’ 공모에 선정됐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에서 처음 실시한 이번 공모사업은 경쟁력 있는 신규 잠정목록을 발굴해 연구비 지원과 컨설팅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올해 전국에서 총 4개 유산을 선정했다.   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14세기에 중창되어 조선 17세기 전반까지 운영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왕실사찰 유적으로 당시 불교, 사상, 건축, 문화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회암사지는 폐사 이후 최근 발굴이 이루어지기까지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등 13~14세기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선종사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고고유적으로 증명하는 귀중한 사례이다.   양주시는 1997년부터 2016년까지 약 20년에 걸친 발굴조사와 함께 회암사지박물관 건립, 유적정비 등 회암사지 종합정비사업을 실시했으며, 회암사지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체계적 보존‧관리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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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5
  • 양주시, 회암사지 최북단 ‘회암사지부도탑’ 국가문화재(보물) 지정 추진
        양주시(시장 이성호)는 양주 회암사지(사적128호) 최북단에 위치한 ‘회암사지부도탑’의 국가문화재(보물) 지정을 추진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는 회암사지부도탑은 조선시대 일반적인 불탑과 차별되는 형태를 가진 새로운 불탑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유적 8단지에 위치한 정청지나 동·서방장지 등 건물지와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구름에 휩싸인 용, 기린 등 생동감있고 뛰어난 조각과 치석수법은 조선시대 왕실발원 석조물과 양식적으로 친연성을 보이고 있으며,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던 불탑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울러,『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1464년(세조 10) 4월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1396~1486)는 회암사 동쪽 언덕에 석종(石鐘)을 건립하고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며, 법회를 열어 『원각경(圓覺經)』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또, 이날 저녁 여래가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사리가 분신(分身)하여 수백여 개가 되는 등의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관계자는 “각종 기록과 연구 결과 등을 종합할 때 회암사지부도탑은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등재돼 보호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며 “앞으로 회암사지부도탑에 대한 보존관리와 활용계획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양주 회암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통해 회암사지의 세계 유산적 가치를 증명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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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4
  • [photo] 태극기가 바람에..
          국사봉 태극기와 전곡 전경 ⓒ강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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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3
  • 경기도, 기념물·문화재자료 등 지정문화재 정기조사 실시
      경기도와 경기문화재연구원은 기념물, 문화재자료 등 도 지정문화재의 일반현황, 입지현황, 관리현황 등에 관한 정기조사를 실시한다고 1일 밝혔다. 경기도 지정문화재 제도는 도내 문화재 중에서 ‘역사적ㆍ예술적ㆍ학술적 또는 경관적 가치가 큰’ 대상을 기념물, 유․무형문화재, 문화재자료로 지정해 보호하는 제도다.   경기도는 앞서 2015년 국내 최초로 전문기관인 경기문화재연구원을 통한 정기조사를 실시했으며, 이번 조사는 이후 추가 지정된 문화재와 변화 사항을 포함하여 시행된다. 조사대상은 31개 시·군 소재 기념물 183건, 문화재자료 18건 등 총 201건의 지정문화재로 올해 말까지 조사가 이뤄진다.   현장조사는 관련 전문가들을 점검위원으로 구성해 3월부터 7월까지 실시되며 보존관리현황 및 변화, 노후도, 훼손도, 방재설비 등 관리 실태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와 함께 문화재 및 보호구역에 대한 적정성 등에 대한 검토가 이뤄진다. 조사결과는 시·군에 통보해 문화재 보호관리 방안 수립과 보수정비 우선순위 결정, 문화재 소방 및 안전관리 실태에 대한 문제점 개선 등에 활용되며 필요한 사업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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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7
  •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특별전시 연계 학술세미나 개최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은 (사)국제온돌학회와 함께 오는 2월 1일 회암사지박물관 1층 강당에서 <온돌 : 회암사의 겨울나기> 특별전시 연계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학술세미나는 국제온돌학회 소속 온돌건축분야 전문가의 주제발표를 통해, 사적 128호 양주 회암사지의 온돌과 우리나라 온돌문화의 가치를 재조명할 예정이다.     발표자는 중국 심양건축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이자 국제온돌학회장인 김준봉 교수를 비롯해 목포대학교 김지민 교수, 전남대학교 천득염 교수, 전통온돌기술자 신용선 ㈜구들 대표이사 등 우리나라 온돌건축분야의 최정예 연구자들이 참여한다. 또 국제온돌학회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온돌의 우수성과 회암사지 온돌의 가치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도 마련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고유 민속문화인 온돌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들을 수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특별전시 종료를 앞두고 회암사지 온돌의 가치를 조명하는 이번 학술세미나에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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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9
  • 임진강 평화문화권 38선 역사체험길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
      총사업비 84억 중 국비 37억 원 및 특조금 8억 원 지원    포천시는 지난 12일 포천시청 시정회의실에서 박윤국 시장 및 포천시의회 의원들과 교수 등 내·외부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임진강 평화문화권 38선 역사체험길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 용역보고회를 가졌다.       38선 역사체험길 조성사업은 2014년 10월 ‘임진강 평화문화권 지원사업’으로 선정됨에 따라 창수면 오가리, 영중면 영송리, 일동면 수입리 일원에 총 17km에 폭 2~3m, 총사업비 84억 중 국비 37억 원 및 특조금 8억 원을 지원받아 진행되는 사업이다.      사업은 남북이 38선으로 분단된 역사적 사실을 재발견하고, 영평천 일대를 자연과 예술이 이루어진 공간으로 재탄생시켜 남북경협 거점도시 포천의 역사체험 문화브랜드로 창조하고자 추진된다.       포천시는 최근 구리~포천 고속도로 개통과 전철 7호선 연장사업 등 교통접근성 확대에 발맞추어 38선 영중면 일대의 군사 낙후지역의 이미지를 벗고 관광문화의 공간으로 주요 관광 체험시설로 자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용역보고회에서는 2016년 12월 실시설계용역을 발주하여 관련부서의 주요 사전협의를 완료하고 38선 역사체험길 조성사업의 기본계획(안)에 대해 지역 현안과 문제에 대해 도의원 및 시의원, 설계 전문위원과 관련부서장 등 내·외부 위원들이 참석해 많은 질의와 의견을 나눴다.       박윤국 시장은 “이번 용역보고회가 우리 시의 체험공간 확충뿐만 아니라 남북경협 거점도시 포천의 청사진이 될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이다. 애정과 관심으로 참석해주시고 소중한 의견을 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포천시는 이번 용역보고회에서 나온 의견과 건의사항을 토대로 가급적 빠른 시일 내 최종보고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포천시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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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5
  • [역사기행]청고(淸高)한 학(學)의 모습 '미수(眉叟) 허 목'
      “세 칸의 띳집이 숲속 그늘에 있었는데 넓은 뜨락 한 모퉁이 뾰족한 돌무더기를 모아 금강산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바위에는 이끼 무늬가 어룽대고 그런 사이에 전서(篆書) 글씨를 새겨 넣으니 제법 예스러운 모습으로 보였다. 방안에는 쓸쓸하게 다른 물건은 없었고, 더부룩한 눈썹에 성긴 수염은 청고(淸高)한 골상(骨相)이 마치 깡마른 학(鶴)의 모습 같았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한 세대 이상 후배이던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1) 는 아버지(崔碩英)가 연천현감으로 근무하던 1665년(현종 6년) 16살의 나이로 당시 71세의 허목을 찾아가서 만났는데 미수의 생전 모습과 사후의 유상(遺像)으로 전하는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대단한 관찰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허목은 3년 전에 삼척부사직을 사임하고 5대조 허훈(許薰)을 비롯한 선조들의 묘소가 있는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로 낙향하여 독서와 저술에 힘을 쓰며 십청원(十淸園)과 괴석원(怪石園)을 만들어 도가적인 삶을 살며, ‘청고(淸高)한 학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다가 간 미수 허목.    허목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1595년(선조 28) 한양의 창선방(彰善坊)2)에서 태어나서 68세에 선조들의 고향인 연천에 정착할 때까지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다.   유년시절은 7년 전쟁, 임진왜란의 와중이었고, 15세 부터는 부친의 임지를 따라 20년 가까이 여러 곳을 전전했는가 하면 한창 일할 나이인 32살 때에는 인조(仁祖)로부터 정거(停擧)3)를 당하여 좌절을 겪는데 후에 벌(罰)이 풀렸음에도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란(胡亂)을 겪으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1646년(인조 24) 선영을 중심으로 형성된 향리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어머니가 의령에서 돌아가시자 연천의 선산에 장례를 치르고 3년 후, 56세에 비로소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고, 내시교관, 조지서 별좌, 공조좌랑, 용궁현감, 지평 등 매년 새로운 벼슬에 제수되고 바로 사임하고 하는 일이 10년 가까이 반복된다. 허목은 왜 그렇게 관직을 맡지 않으려고 했을까? 아마 이것은 증조부 때부터 시작된 불행에 연유한 때문일 것이다.     증조부 허자(許磁;1496~1551)는 문정왕후 시절 문과에 합격하여 박사ㆍ수찬을 거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4)하여 교리ㆍ응교ㆍ검상ㆍ전환 등을 역임한 뒤 이조정랑에 오르는 등 순탄한 관리생활을 이어 나갔다. 명종이 즉위한 이후 호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을 때,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과 함께 소윤(小尹)으로서 대윤(大尹) 윤임(尹任)의 제거에 가담,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으로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좌찬성(종1품)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 등 영화를 누렸으나 이기(李芑) 등 과 대립하면서 그들의 미움을 받아 함경남도 홍원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기고 박람강기(博覽强記)5)하여 심성이 높고 깨끗하여 이달(利達)6)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아들 허강(許橿:허목의 조부)은 아버지가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홍원으로 귀양 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여막살이를 하는 등 매우 슬퍼하였다. 그 행동거지가 바르고 곧아서 여러 차례 조정으로부터 부름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40년간 강호(江湖)를 방랑하면서 옛사람의 책으로 스스로 즐거움을 찾고 다른 사람과 교유를 사절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 토산에서 피난하던 중 그곳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허목의 아버지 허교(許喬)는 이런 배경에서 성장하여 난중(亂中)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니 25세의 나이에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책임감으로 종9품 군자감 참봉부터 시작하여 여러 미관말직을 거쳐 25년 만에 종6품 거창현감의 자리에 올랐고, 포천현감을 마지막으로 65세로 임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약 40년 동안의 벼슬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평소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까. 평소에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고, 32세 때 자신이 옳다고 행한 일에 대하여 인조(仁祖)가 글공부하는 선비에게 가장 치명적인 벌(罰)인 정거(停擧)의 조치가 내려짐으로서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리고 조부(祖父)처럼 전국을 유랑하며 스승을 찾고, 글공부에 매달렸던 것이다.      1650년(효종 1) 정월 56세의 나이로 비로소 추천(推薦)으로서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제수되자 그의 어머니가 "선인께서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자 그는 수긍하고 관직에 나갔으나 1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651년(효종 2) 10월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임명되었다.  1652년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 정육품 조지서 우두머리 )에 제수되어 상경하였으나 그해 6월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자 사직하고 내려가 부임하지 않았다. 벼슬을 제수하면 바로 사직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63세인 효종 8년(1657) 지평(持平: 사헌부 정오품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1년 만에 장령으로 옮겼고, 현종 즉위하여 사헌부 장령(掌令: 정사품 관직)으로 예(禮)를 간쟁(諫爭)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삼척부사의 자리도 노론의 무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60개월(5년)의 임기도중인 2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허목이 내직(內職)7)이던 외직(外職: 지방관) 이던 임금이 제수하는 직책에 오래 있지 못하고 거듭 사직을 하게 되는 것도 선조(先祖)들의 순탄치 못했던 관직 생활과 아버지의 유훈(遺訓) 등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점차 깊어가는 당쟁의 폐해로 조정의 말단 하리(下吏)까지 노론의 무리로 가득 찬 상황에서 관리로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意志)를 펼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미 효종 시절부터 조정 내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서인들은, 현종 시절 사헌부 장령의 위치에 있던 허목이 제1차 예송논쟁에 밀려 삼척부사로 좌천되어서 10 여년을 연천에서 저술과 독서에만 몰두하다가 숙종의 부름을 받고 대사헌에 임명되어 숙종의 신하로서 궁궐에 출입할 당시의 기록인 《숙종실록(1년~5년)》을 살펴보면 사관들이 편파적이고 주관적으로 사초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록의 주된 내용은 매일 매일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기록한 기사여야 하는데, 당시의 기사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사론(史論)과 같은 논조로 사초를 작성하였고, 사론(史論)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중상모략을 담아 무차별 인신공격을 가하고 있어 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러한 내용이 상당히 많지만 대표적인 내용 하나만 살펴보자. 허목이 소(疎)를 올려 아뢰기를  “전에 직강(直講)을 지낸 이태서(李台瑞)는 문사(文詞)로 이름이 나서 지금 세상에는 이만한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중략) .........허목은 을사년559) 간신 허자(許磁)의 손자로서 그의 어미는 시인(詩人) 임제(林悌)의 딸이었다...............(중략) ........... 허목은 밖으로는 대범하고 명랑한 것 같지마는 속은 실지로 간사하였으며, 눈썹의 길이가 거의 한 치나 되었기에 스스로 미수(眉叟)라고 호를 지었다. 그러나 눈초리가 굽고 눈동자가 분명치 못하였다.  .......... (중략) .......... 허목은 오로지 보복(報復)을 일삼아서 비록 늙고 혼미(昏迷)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그릇되고 잘못됨이 많지마는, 송시열을 공격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앞장섰고, 기관(機關)이 교묘하고 주밀하였다. ...... (하략) ......                                  (숙종 3권, 1년(1675 을묘) 4월 10일 기사)    이날의 기사는 숙종이 보위에 오른 지 채 1년도 안 되는 숙종 1년 4월 10일의 기사로, 허목이 관직에 추천하여 직강(直講)의 자리에 임명된 이태서(李台瑞)가 서인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 일에 책임을 느낀 허목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기사 말미에 ‘사신은 논한다’는 사론(史論)의 전제(前提)도 없이 허황되고 근거 없는 장문(長文)으로 허목을 극렬하게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선조(宣祖) 때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파당(派黨)의 폐해는 이미 온 조정(朝廷)을 덮어 말단 하리(下吏)로 부터 사관(史官)에 이르기 까지 요소요소에 포진한 파당(西人)의 무리가 임금의 부름을 받아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유일하게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허목을 극렬하게 깎아내리고 있다.   미수 허목의 학문적인 연원(淵源)8)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수제자인 허목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근기(近畿)지역으로 옮겨 받아 고학(古學)과 고문(古文)이라는 고경(古經)으로 방향을 틀어 ‘근기(近畿)학파’를 열었고, 조선 후기 3대 학자라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성호(星湖) 이익(李瀷),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라는 걸출한 후학들이 뒤를 이어 학문적 연원을 이룩했다.    허목은 자신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문집을 ‘기언(記言)’이라고 했다. 당시 모두가 ‘문집(文集)’이라 했건만, 선생 자신이 ‘기언(記言)’이라고 정했다. 굳이 문집이라고 하지 않고 기언이라고 한 것은 ‘기언(記言)’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허목은 고서(古書)를 무척 좋아했고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穆篤好古書 老而不怠)” 라는 첫 글귀가 선생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웅변하고 있다. 모두가 성리학에 열중하여 송나라 주자(朱子) 이후의 학문에 경도(傾倒) 되었을 때 선생은 옛글, 최소한 이전의 공맹(孔孟)의 학문만을 좋아해서 늙도록 게으르지 않게 그런 부분만 연구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미수의 상고정신(尙古情神), 즉 옛 것을 숭상하는 마음은 흔히 말하는 복고주의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이우성(李佑成) 교수(1925~2017.한문학자, 국사학자)는 밝혔다.   “고문(古文). 고서(古書)의 ‘고(古)’를 숭상하는 미수의 상고정신은 중세에 대한 부정이며 중세에 대한 부정은 동시에 관념화된 당시의 성리학-주자학 정신 풍토의 부정이다. 주자학적 권위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정점에 도달한 17세기 당시에 그 권위의 구축에 일생의 정력을 바친 송시열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 교수의 주장처럼 주자학적 권위주의를 탈피하려는 변혁의 발단이 바로 미수(眉叟)에게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1, 2, 3차로 이어지는 예송논쟁은 왕권과 신권의 충돌, 또는 단순한 당쟁의 산물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학문적 뒷받침 속에서 허목과 송시열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경쟁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원년(1675) 80세의 나이로 부름을 맞아 1년 동안 5번이나 관직을 옮겨 삼공(三公)에 이르니 81세였다. 14살의 소년왕 숙종은 팔순이 넘은 노신을 극진히 예우하였다. 그러나 경신환국(庚申換局)과 기사환국(己巳換局)과 같이 여러 차례 정국을 손바닥 뒤집듯 하여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많은 신하들을 희생시켰다. 허목은 85세에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9)으로 조정에서 남인들이 쫓겨나갈 적에 삭출(削黜)10)을 당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부름을 받지 못하여 88세 되던 해 4월 병이 나서 조석으로 배알하던 선조의 묘를 가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그동안 부탁받은 남의 책 서문, 가장(家狀), 묘문(墓文)과 전서(篆書)를 써달라는 종이를 봉해 돌려주거나 하면서 주변을 정리하며 서제(庶弟)인 달(達)을 시켜 손톱을 깎고 머리를 빗기도록 하였다. 4월 27일 갑진일에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 밖에서 들어와 문안을 여쭙자     “제군(諸君)들 왔는가, 모름지기 잘 있게.”   하고서 조금 있다가 편안히 운명했다. 이때가 4월 27일(甲辰) 인시(寅時)11)였다.    미수 허목은 생전에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숙종은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시독관(侍讀官) 이봉징(李鳳徵)과 승지(承旨) 권환(權瑍)의 건의에 따라 ‘허목(許穆)의 문자를 간인(刊印)토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주(註)1) 최규서(崔奎瑞) : 1650년(효종 1)~1735년(영조 11) 본관은 해주(海州). 시호는 충정(忠貞).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광주(廣州) 출신. 삼당시인으로 꼽히는 최경창(崔慶昌)의 현손이며, 최집(崔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진해(崔振海)이고, 아버지는 현감 최석영(崔碩英)이다. 2) 창선방(彰善坊) :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동부 7방 중의 하나로서,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원남동・인의동・연지동・효제동・종로5・6가 각 일부에 해당된다.3) 정거(停擧) : 조선시대 유생에게 과거 응시자격을 일시적으로 박탈하던 제도. 4)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5) 박람강기(博覽强記) : 여러 가지 책을 널리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함. 6) 이달(利達) : 이익(利益)과 영달(榮達)7) 내직(內職) : 서울에 있는 각 관아의 관직 및 수원 · 광주 · 개성 · 강화의 유수(留守). 경관직(京官職).8) 연원(淵源) : 사물이나 일 따위의 근원(根源).9) 경신대출척 :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        10) 삭출(削黜) : 벼슬을 빼앗고 내쫓음.11) 인시(寅時) : 이십사시(二十四時)의 다섯째 시. 오전 세 시 반부터 오전 네 시 반까지이다.            <연천문인협회 회장>  <연천군 향토문화재 위원>   최병수(崔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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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4
  • [속보]연천 민통선에 숨겨진 대규모 고인돌 집단지 발견
      연천군 중면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남방식 고인돌'인 무지석 지석묘. ⓒ뉴스매거진21       [뉴스매거진21-중앙일보 공동취재]    경기도 연천군 중면 민통선 지역에서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2500∼2700년 전 이상 된 청동기 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특히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이곳에서는 완벽하게 보존된 남방식 고인돌인 ‘무지석 지석묘(無支石 支石墓: 돌기둥이 없고 바닥에 작은 돌을 깐 고인돌)’가 국내 처음으로 잇따라 확인됐다. 이와 함께 고인돌보다 드물게 발견되는 거대한 자연석으로 만든 ‘선돌’과 곡식을 가는 데 사용한 현무암 ‘연석’, 돌을 가공해 만든 ‘석검’ 등 청동기 시대 유물도 함께 나와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2일 오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진명산 까마봉 정상 부근인 해발 266m 산비탈에는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무지석 지석묘 1개가 있었다. 가로 3m, 세로 2m, 두께 70㎝∼1m 크기다. 운모편마암으로 된 이 고인돌은 같은 재질의 커다란 바위 위에 잔돌을 깔고 놓여 있다. 주변엔 수풀이 우거진 상태였다. 이곳은 휴전선과 불과 5㎞ 거리다. 이곳과 500m 거리에는 7개의 무지석 지석묘가 일렬로 늘어선 채 반쯤 땅에 묻혀 있는 ‘열석’ 방식으로 조성된 고인돌이 보였다.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무지석 지석묘ⓒ뉴스매거진21 이병주 국사편찬위원회 경기연천군사료조사위원이 소개하고 있다. ⓒ뉴스매거진21    이병주 국사편찬위원회 경기연천군사료조사위원이 소개하고 있다. ⓒ뉴스매거진21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발견 지역 ⓒ뉴스매거진21    원형 보존된 남방식 고인돌인 ‘무지석 지석묘’ 잇따라 발견    현장을 안내한 이병주 국사편찬위원회 경기연천군사료조사위원은 “국내에서 발견된 무지석 지석묘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 중 하나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정도 보존상태라면 고인돌 아래에 석검·석촉 등 청동기시대 부장품이 그대로 묻혀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형태로 볼 때 2500여 년 전인 기원전 4∼5세기 청동기시대 족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열석 고인돌은 보기 드문 형태의 고인돌 집단지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연천군 중면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북방식 고인돌'. 받침돌이 무너져 상석이 비스듬히 놓여 있다. ⓒ뉴스매거진21      고인돌에 약 한뼘 간격으로 성혈이 5개가 이어져있다. ⓒ뉴스매거진21      고인돌 주변 집터용 주춧돌로 추정된다. ⓒ뉴스매거진21     곳곳에 성혈의 흔적이 있는 고인돌 ⓒ뉴스매거진21       이곳에서 300여m 거리의 콩밭 옆에도 비슷한 크기의 무지석 지석묘가 있었다. 지석묘 상석 바깥쪽에는 직경 3∼4㎝, 깊이 2∼5㎝ 크기의 구멍인 ‘성혈’ 5개가 나란히 파여 있었다. 이 고인돌 옆에는 자연석으로 된 어른 키 높이 정도인 가로 1m, 세로 2m 크기의 선돌이 세워져 있었다.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선돌'. ⓒ뉴스매거진21   “별자리 의미로 뚫어 놓은 ‘성혈’도 상석에 존재”     이병주 위원은 “고인돌 상석에 성혈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드문 일”이라며 “성혈은 별자리를 의미하거나 주술적 의미로 뚫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고인돌 옆 운무편마암 절벽에서는 7개의 구멍을 일렬로 뚫어 놓은 성혈도 발견됐다”며 “이는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 옆 암석에 파여진 7개의 '성혈'.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병주    이병주 위원은 “선돌이 발견된 점을 볼 때 아늑한 분지 지형을 이룬 이곳에 청동기 시대에 마을이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특히 이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곡식을 돌로 가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현무암으로 만든 25㎝ 길이 ‘연석’과 사냥할 때 사용했던 10㎝ 길이 ‘석검’도 발견된 점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 주거지임이 분명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곳에선 이와 함께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도 발견돼 학술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연천군 중면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북방식 고인돌'. 받침돌이 무너져 상석이 비스듬히 놓여 있다. ⓒ뉴스매거진21    연천군 중면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북방식 고인돌'. 받침돌이 무너져 상석이 비스듬히 놓여 있다. ⓒ뉴스매거진21      특히 선돌 100m 지점에는 받침돌이 양쪽에 있는 북방식 지석묘도 발견됐다. 하지만 이 고인돌은 받침돌이 쓰러진 상태로 상석이 비스듬히 받침돌 위에 놓여 있었다. 500여m 이내 콩밭 주변에도 땅에 묻힌 무지석 지석묘 5개가 보였다. 콩밭 경계 곳곳에도 밭을 개간하며 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무지석 지석묘 상석 6개가 방치돼 있었다.     마을 상징하는 ‘선돌’과 곡식 가는 청동기 유물 ‘연석’도 나와     이곳에서 1㎞ 거리인 연천군 중면 적거리 민통선 내에서는 지난 2005년 7월 국내 처음으로 원형이 완벽하게 보존된 ‘무지석 지석묘’가 최무장 전 건국대박물관장에 의해 발견됐다. (중앙일보 2005년 7월 23일자 10면)        임진강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동서로 놓인 이 상석은 가로 2.7m, 세로 2m, 두께 25~60㎝ 크기로 바닥과 주변(길이 5.3m, 폭 2.2m)에 돌을 깨서 만든 길이 10~20㎝의 받침돌이 장방형으로 가지런히 깔려 있다.      매끈하게 다듬은 화강편마암으로 이뤄진 상석 윗면에는 동그랗게 구멍을 파서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한 성혈 7개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당시 주변 300여 m 지점 콩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무지석 지석묘 2개를 발견했다. 이 지석묘 상석에선 성혈이 각각 23개와 2개가 패어 있다. 최무장 전 관장은 “상석에 북두칠성을 뜻하는 일곱 성혈을 새긴 것은 드문 일로 학술 가치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연천군 중면 민통선 내에서 지난 2005년 7월 발견된 별자리를 의미하는 ‘성혈’이 파여진 ‘무지석 지석묘’. 최무장 전 건국대박물관장이 소개하고 있다. ⓒ전익진       현장을 확인한 이석우 연천임진강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연천 민통선 지역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인 선사시대 유물인 고인돌 100여 개가 집단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남방식 고인돌인 무지석 지석묘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북방식 고인돌까지 함께 발견된 점은 학술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연천임진강시민네트워크는 연천 민통선 지역 고인돌에 대한 체계적인 지표조사가 실시되고, 문화재 및 고인돌 마을로 지정해 보존 및 관리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연석'. ⓒ뉴스매거진21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석검'. ⓒ뉴스매거진21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 ⓒ뉴스매거진21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고인돌 집단지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 ⓒ뉴스매거진21    “북한 ‘별자리 고인돌’과 비슷한 ‘성혈’ 발견된 것 의미”   평양 지역 고인돌 연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동시추진 가치있어      이와 관련, 임효재(전 서울대박물관장) 동아시아고고학연구회장은 “연천 민통선 지역에서 이번에 발견된 무지석 지석묘와 북방식 지석묘 등은 북한 평양 인근 지역을 방문해 답사해본 고인돌과 매우 유사하다”며 “남방식·북방식 고인돌을 동시에 연구하고 고인돌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원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임 회장은 또 “연천 민통선 고인돌과 북한의 고인돌에서 별자리를 상징해 뚫어 놓은 구멍인 ‘성혈’이 동시에 발견되는 점은 의미가 크다”며 “우리나라는 청동기 시대부터 별자리를 관찰했다는 천문학적인 우수성을 보여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에서는 이런 고인돌을 ‘별자리 고인돌’이라 이름 붙여 독보적인 선사시대의 천문학 유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 회장은 “이에 따라 원형이 잘 보전되고 다수가 분포해 있는 연천 민통선 지역 고인돌과 북한 평양 지역 고인돌을 연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동시에 추진해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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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1
  •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특별전시 ‘온돌 : 회암사의 겨울나기’개최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양주시장 이성호)은 오는 11월 8일부터 내년도 2월 9일까지 ‘온돌 : 회암사의 겨울나기’ 특별전시를 개최한다. 회암사지 ⓒ양주시   ‘온돌’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35호로, 옛날부터 한반도에 사는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우리 고유의 난방시설이다. 최대 3천여 명이 머물렀다고 전해질 만큼 그 규모와 사세가 대단했던 양주 회암사의 광활한 3만여㎡에 달하는 유적지에는 예불공간과 주거공간 등 82동의 많은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총 38개의 건물터에서 발견된 온돌시설은 현재까지 국내 단일 유적 중 최대 규모의 유구 군으로 옛 회암사에서 머물렀던 많은 사람들의 겨울나는 생활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100여건의 전시물과 정보 패널을 통해 사적 제128호 양주 회암사지 곳곳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온돌유구의 현황과 가치를 전달한다.    온돌-회암사의 겨울나기 포스터 ⓒ양주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전시장에 재현한 국내 온돌 건물지 중 가장 큰 규모로 출토된 서승당지의 일부이다. 서승당지는 승려들의 참선공간이자 행사 시 외부인들의 쉼터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남북 길이가 약 32.6m에 달하는 대형 건물 안에 ㅌ자 형태의 탁상구조 온돌이 출토됐다.   회암사지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가 회암사지 온돌의 현황과 가치를 알아보며 조상들의 겨울나는 지혜를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며 “추운 겨울 따듯한 온기를 직접 느낄 수 있는 이번 전시에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관람을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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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1
  • 양주시, ‘양주 회암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재도전
      회암사지 사진. 양주시 제공   양주시(시장 이성호)는 사적 제128호 ‘양주 회암사지’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신청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하는 등 세계유산 등재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양주 회암사지’는 지난해 2월 문화재청에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신청서를 제출, 14세기 동아시아 불교사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고고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등재 기준 재조정, 비교연구 보완 등의 사유로 심사결과가 부결된 바 있다.   이에 양주시는 지난 1년간 회암사지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보완하고 비교연구 강화를 위해 중국 현지조사를 비롯해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잠정목록 등재를 위한 기반을 다져왔다.     무학대사 부도 및 쌍사자 석등 사진. 양주시 제공   그 결과 ‘동아시아 선종사원의 전형’으로서 유일한 고고유적이라는 점을 탁월한 보편적 가치로 새롭게 정리했으며, 유산의 구역을 기존 회암사지 유적지에서 주변 유구 발굴지역과 삼화상 부도, 석등, 비석 등으로 확대하는 등 신청서를 보완해 재도전에 나섰다.   ‘양주 회암사지’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여부는 올해 10월~12월 문화재청의 서류검토와 전문가 현지조사를 거쳐 내년도 1월경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 분과 심의를 통해 결정될 예정이다.       회암사지 전경 사진. 양주시 제공   회암사지는 1964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후 1997년부터 2016년까지 20여년에 걸친 발굴조사, 박물관 건립, 유적정비 등 종합정비사업을 통해 일반에 공개됐다. 고려 중기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회암사는 14세기 공민왕의 후원으로 왕사였던 나옹에 의해 현재와 비슷한 규모로 중창(1374~1376년) 됐다.   조선시대는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이 주석하고, 태조 이성계가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는 행궁 역할을 했으며 이후 왕실의 대대적인 후원을 받으며 조선 최대의 왕실사찰로 사세를 이어가다 17세기 전반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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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3
  • [칼럼]해동성군(海東聖君) 세종(世宗)이 가는 길
    조선초기강무장(야외기동훈련장)으로 사용된 가사평의 재현행사 모습 © 최병수  경기북부를 관통하는 3호선은 세종 강무길   국도 3호선은 원래 경남 남해에서 평안북도 초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다. 그 3호선 중,  서울–의정부–양주-동두천–연천–철원– 평강까지 이어지는 길은 세종이 근 20년 가까이 봄, 가을에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행하던 강무의 행로(行路)이다. 세종은 조선의 무비(武備)가 소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재위 32년 중 24년을 추운 겨울날 병사들과 함께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했던 강무(講武)는 과연 무엇일까?     강무는 ‘조선시대 왕이 신하와 백성을 모아놓고 함께 실시하던 사냥 의식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조선시대에는 봄가을에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야외에서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세종을 거쳐 성종대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군례(軍禮)에서는 그 절차와 의식을 강무의(講武儀)로 규정하고 있다. 강무는 사냥을 통한 실전 연습이었다. 사냥은 평상시 국가의 무비(武備)를 닦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였다. 전국의 병력 동원으로부터 강무장까지의 행군, 금고기치(金鼓旗幟)에 의한 군령의 습득, 짐승 몰이를 위한 다양한 진법의 활용, 목표물을 잡기 위한 활쏘기의 연마 등 군령과 군정(軍政)을 한꺼번에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실제로 강무는, 기본적으로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르는 군사들을 동원하는 종합적인 군사훈련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강무는 조선 초기 태조 5년에 정도전의 발의로 시작되었고, 태종대에 강무의(講武儀)가 제정되면서 본격화되었으며 세종대에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매년 봄, 가을에  실시함으로서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이 개국하고 20년 가까이 어수선했던 정국이 안정되고 사후에 성군(聖君이라고 칭송될 만큼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임금이 궁궐을 떠나 길거리 백성들과 소통하는가 하면 각종 악조건 속에도 군사들을 조련하여 나라의 무비(武備)를 튼튼히 하는 강무의 진정한 의의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강무(講武)는 초기에는 경기도·강원도·황해도·충청도·전라도·평안도 등 전국을 순행하면서 군사를 훈련하는 형태로서 진행되었으며, 지역을 위무(慰撫)하고 전국의 감사들에게 문안을 하게 함으로써 왕 중심의 집권 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 이후 강무는 한양과 가까운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세종의 경우는 양주-연천-철원-평강으로 이어지는 행로를 가장 선호했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많은 강무(講武)를 행한 세종답게 강무에 대한 의지는 신념(信念)으로 가득 찬 것이어서 지속적으로 강무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동서고금의 여러 사례를 들어가며 강하게 몰아 부칠 만큼 감히 꺾을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 군사(軍士)는 자주 조련(操鍊)하여 한서(寒暑)의 고통을 익히고, 기계의 장비를 정하게 하며, 무릇 좌작진퇴(坐作進退)의 절차와 모든 부지런하고 수고로운 일을 미리 연습하여 익숙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가히 군사(軍士)의 일을 알 것이다. “... 원조(元朝)에서 대도(大都)와 상도(上都)를 두고 해마다 순행(巡行)한 것은 한 곳에 편히 앉아 있는 것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고려 태조가 자손에게 유훈(遺訓)하기를, ‘ 서경(西京)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고 하여, 이로써 후세의 자손들이 해마다 내왕하였으며, 또 달달(達達)이 성(城)을 공격할 때에 이기지 아니한 적이 없었던 것은 유목(遊牧)하는 종족(種族)으로써 음식(飮食)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진(女眞)의 풍속도 역시 이와 같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항상 음식으로써 일을 삼으니, 급할 때에 이르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강무(講武)의 시작과 끝     본격적인 강무를 시작하기 전 병조에서는 강무 개시 7일전에 여러 백성을 불러서 사냥하는 법에 따르게 하고 사냥하는 들판을 표시(表示)한다. 그리고 강무장 둘레에 깃발을 꽂고 잡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여 임금과 장졸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강무 당일 이른 아침 강무(講武)를 행할 것을 고(告)하는 제사를 종묘에 지내고, 궁궐을 나서는데 문무백관이 흥인문(興仁門) 밖까지 나와 전송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강무에는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부마 및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이 한 사람씩 호종(扈從)을 하고, 규모가 적을 때에는 본궁의 병사 2,500명 정도만 참여하고 많게는 한양 인근의 황해도, 충청도 병사까지 참여하여 15,000명까지 참여하여 약 10일간의 기간으로 평강 분수령 행궁까지 갔다가 포천을 거쳐 양주로 해서 흥인문으로 환궁하는 것이 상례였다.    세종이 세종 원년부터 24년까지 매년 1~2회 실시하였던 강무 기록을 참조하여 약 10여 일 간의 강무행로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첫째 날 – 낮참에 양주 녹양평에 머물다   이날 거가(車駕)가 흥인문을 출발하여 점심참에 양주(楊州) 사천동 어구에 머물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경녕군(敬寧君) 이비(李)·공녕군(恭寧君) 이인(李䄄)·의성군(誼城君) 이용(李㝐)이 입시(入侍)하고, 경기 감사 김겸(金謙)·경력 안숭선(安崇善)·정역 찰방(程驛察訪) 이길배(李吉培)·양질(楊秩)·양주 부사(楊州府使) 이승직(李繩直) 등이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맞아 뵈오니, 거가를 수종하는 당상관(堂上官)에게는 친히 술잔을 내리고, 3품 이하에게도 술을 내리었다. 이로부터 거가가 회정할 때까지 이 예로 하였다. 저녁에 풍천평(楓天平)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머무르니, 경기·충청·전라도의 감사는 말과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고, 평안도 감사는 매[鷹] 3마리를 바치고, 경기 감사는 또 술과 과일을 진상하였다. 조선 초기 강무에 동원된 병력과 기마의 예 실록 상에는 태종대에는 측근(이숙번 등) 2~3명, 갑사(甲士) 500명과 대간, 형조 각 1명 등 대규모 군사훈련이라기보다는 사냥을 떠나는 것과도 같이 단출하게 떠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규모가 커도 5,000명에서 7,000명 미만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세조같은 경우는 구군(驅軍;몰이꾼)이나 기병(騎兵) 외에도 온 조정이 다 따라 나서고, 왕자, 종친들까지 참여하여 2만 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인원이 많고 동원되는 마소(馬牛)의 숫자가 많을수록 몰이꾼들에게 지급할 식량, 장수(將帥)와 갑사(甲士), 병사 등에 지급할 급료, 우마(牛馬)에게 먹일 마초(馬草)의 공급 등 강무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수반되는 어려움으로 문제점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세종 6년(1424) 9월 14일 강무를 떠나기 전 강무 지응사(支應使)가 임금에게 올린  ‘강무할 때의 금령(禁令) 조목’ 을 살펴보면 1. 사복시(司僕寺)의 마필(馬匹)은 들풀이나 곡초를 물론하고 먹일 것.1. 사옹(司饔)·사복(司僕)·충호위(忠扈衛)와 상의원(尙衣院)의 여러 관원들이 각 고을의 공급하는 이민(吏民)을 마음대로 구타하지 못하고, 만약 어기고 그릇된 것이 있으면 대언사(代言司)에 진고(進告)할 것.1. 시위(侍衛) 대소(大小) 군사의 마필을 먹일 건초(乾草)는 각 숙소에 미리 적치(積置)하여 놓고, 비록 부족하더라도 민간에서 거둬들이지 말게 할 것.1. 부득이하여 물이 깊은 곳에 다리 놓는 것 이외에는 도로를 수리하지 말 것.1. 그 도의 감사(監司)·수령관과 경과하는 고을 수령 외의 각 고을 수령들은 지경(地境)을 넘어와서 현신(現身)하지 못하게 할 것.1. 위의 항목에 해당하는 사건 외에 감사나 수령이 민간에서 거둬들여 은밀하게 인정을 쓰는 자는 어가를 따르는 찰방(察訪)이 무시(無時)로 수색하고 체포하여 논죄하게 할 것“  등 총 9개 항목 중 6개 항목이 강무로 인한 민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제정한 금령(禁令)인데 강무의 시행과정을 꼼꼼히 챙기지 않을 경우 강무(講武)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날 – 가사평(袈裟坪)과 불로지산에서 사냥하다  연천(漣川)의 가사평(加士平)과 불로지산(佛老只山:불견산?)에서 몰이하고 낮참으로 연천에서 머무르니, 연천 현감 신회(辛回)가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였다. 오후에 오봉산에서 몰이하고 저녁참에 송절원평에 악차를 배설하니, 경기 감사가 술 50병과 찬(饌)을, 황해도 감사가 방물과 매 3마리와 사냥개 2마리를 바쳤으므로, 거가를 따르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몰이하던 가사평(袈裟坪:가사뜰)은 조선왕조 초기 경기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강무장이다. 도성을 떠나 병사들이 짐승을 몰이하고 임금을 비롯한 장수들과 일반 병사들까지 참여하여 활을 쏘아서 짐승을 잡는 실질적인 강무행사를 개시한 곳이 가사평(袈裟坪)이다. 이날 가사평에서 행해진 강무의 모습을 세종실록 부록에 나오는 강무의(講武儀)에 근거하여 좀 더 자세히 재현해보면 이렇다.    조선왕조 초기, 나라에서 강무장으로 정한 가사평은 평사 시 강무장 안의 초목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며, 사냥도 금하게 하여 드넓은 뜰에 갈대와 잡목이 우거진 들짐승들이 많이 서식하는 군사훈련장 겸 공식 사냥터였다. 이미 병조에서 일주일 전에 금줄을 치고 일반 백성과 잡인의 출입을 금지한 상태였다.         1. 장수의 지휘 하에 몰이꾼(驅軍)들이 몰이한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가사평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조(兵曹)의 하급군관들이 강무를 개시하는 전령(傳令)을 통하여 나누어 알려서, 구군(驅軍: 몰이꾼)들이 에워싸고 사냥을 시작하게 한다. 날짐승의 양 날개와 같이 양익(兩翼)의 장수(將帥)가 모두 기를 세우고 구군(驅軍)들을 지휘하여 에워싸는데 그 앞은 빠뜨린다. 어가(御駕)가 나와서 머물기를 평상시와 같이 한다. 장차 사냥하는 장소에 이르려 하여 어가(御駕)가 북을 치면서 가서 에워싼 데로 들어간다. 유사(有司:행사 총지휘자)가 북을 어가의 앞에 진열하도록 한다. 동남쪽에 있는 사람은 서향하고, 서남쪽에 있는 사람은 동향하여 모두 말을 탄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북을 치면서 가서 에워싼 데 이르고, 이에 몰이하는 기병을 설치한다. 이미 임금께서 말을 타고 남향하면 유사(有司)가 뒤따르고, 대군(大君) 이하의 관원이 모두 말을 타고 궁시(弓矢:활)를 가지고 어가의 앞뒤에 진열한다.   2. 임금이 먼저 활을 쏘고, 왕자, 장수와 군사, 일반 백성의 순서로 사냥   유사가 이에 짐승을 몰이하여 임금의 앞으로 나온다. 처음에 한 번 몰이하여 지나가면, 유사가 궁시를 정돈(整頓)하여 앞으로 나오고, 두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병조에서 궁시를 올리고, 세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임금이 그제야 짐승을 따라 왼편에서 이를 쏜다. 몰이할 적마다 반드시 짐승 세 마리 이상으로 한다. 임금이 화살을 쏜 뒤에야 여러 군(君)들이 화살을 쏘고,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차례로 이를 쏜다. 이를 마치고 몰이하는 기병이 그친 뒤에야 백성들에게 사냥하도록 허락한다.  3. 짐승을 사냥하는 방법   무릇 짐승을 쏠 적에는 왼쪽 어깨 뒤와 넓적다리 앞을 쏘아서 오른쪽 어깻죽지 앞의 살을 관통하는 것을 상(上)의 것으로 삼는데, 건두(乾豆)로 만들어 종묘(宗廟)에 받들며, 오른쪽 귀 부근을 관통하는 것이 이에 다음 가는데, 빈객(賓客)을 접대하며, 왼쪽 넓적다리뼈에서 오른쪽 어깨 뼈 사이로 관통하는 것을 하(下)로 삼는데, 포주(庖廚:푸주 : 소, 돼지 따위를 잡아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일)에 충당한다. 몰이할 때 여러 짐승을 서로 따르는데, 다 죽이지 아니하고, 이미 화살에 맞은 것은 쏘지 아니하며, 또 그 면상(面上)을 쏘지 아니하고, 그 털을 자르지 아니하고, 그것이 표(表) 밖에 나간 것은 쫓지 아니한다.   장차 사냥을 그치려고 하면, 병조에서 기(旗)를 사냥 구역의 안에 세우고는, 이에 어가(御駕)의 북과 여러 장수들의 북을 크게 치면, 사졸(士卒)들이 고함을 치고, 여러 짐승을 잡은 것을 기 아래에 바치면서 그 왼쪽 귀를 올린다. 모아진 짐승 중에 큰 짐승은 관청에 바치고, 작은 짐승은 자기 소유로 한다. 사자(使者)를 보내어 잡은 짐승을 달려가서 종묘(宗廟)에 올리고, 다음에는 악전(幄殿:임금이 머무는 곳)에서 연회하고 종관(從官)에게 술을 세 순배(巡盃)를 내린다.   4.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  1. 사냥할 때는 여러 장수들이 사졸(士卒)로 하여금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1. 어가(御駕) 앞에 기를 세워서 첨시(瞻視:이리 저리 둘러보아)를 구별하게 하며,   1. 어가 앞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내금위(內禁衛)와 사금(司禁) 이외에, 모든 잡인(雜人)들을 일절 모두 금단(禁斷)하게 하며,   1. 삼군(三軍)이 차례대로 포열(布列)하여 에워싼 속으로 짐승을 모두 몰이하여 들이는데, 빠져 나가는 놈은 군사들이 쫓아가서 화살로 쏘는데, 그 위차(位次:미리 정해진 순서)를 지나면 그치고 쫓지 말게 하며,   1. 모든 잡인들은 에워싼 앞으로 먼저 가게하고, 에워싼 안에서 화살을 쏘고 매와 개를 내놓지 못하게 하며,   1. 무릇 영을 어긴 사람은, 2품 이상의 관원은 계문(啓聞)하여 죄를 과(科)하게 하고, 통정(通政) 이하의 관원은 병조에서 바로 처단하게 하며, 도피(逃避)한 사람은 죄 2등을 더하며, 비록 에워싼 밖이라도, 앞을 다투어 화살을 쏘아서 혹은 사람의 생명을 상해(傷害)하거나, 혹은 개와 말을 상해한 사람은 각각 본률(本律)에 의거하여 시행한다.     세종은 왕세자를 비롯하여 종친, 부마 및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등  관리들과 장수와 병사(군관, 기마병, 몰이꾼) 등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거의 매년 한 차례 이상 궁궐을 나와 양주의 녹양평을 거쳐 연천의 가사평, 철원의 갈마재, 평강의 분수령까지 갔다가 귀로에 포천의 보장산과 매장원을 거치는 왕복 600여리의 길을 오가며, 그것도 농번기를 피하느라 아직도 밖에는 날씨가 추운 봄 2월이나 3월, 가을에는 10월이나 11월에 약 15,000명에서 20,000명 가까운 장수와 병사들을 이끌고 빈틈없이 강무(講武)를 실시했다. 따라서 강무 시작단계에서부터 빗발치는 문신들의 반대, 혹독한 날씨, 훈련 중 일어나는 불의의 사고 등, 도성(都城)으로 귀환(歸還)하는 순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만만치 않은 여정(旅程)이었다.    세종 13년(1441) 2월 20일 포천 매장원에서의 강무행사는 혹독한 날씨로 인하여 병사들이 무려 26명, 우마(牛馬)가 70마리나 얼어 죽고,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는 등 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한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때도 세종은 2월 12일 도성을 떠나 2월 13일 연천의 송절원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철원 마산뜰(14일)- 평강 적산(16일)–철원 대야잔(18일)-영평 굴동(19일)에서 강무를 실시하고 영평 보장산 부근인 매장원에서 마지막 강무를 실시하고 도성으로 귀환할 예정이었는데 이런 큰 사고가 난 것이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친 것도 큰 일이거니와 가뜩이나 지병으로 인하여 건강이 여의치 못한 임금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하여 3개월간의 논란 끝에 종국에는 영의정까지 석고대죄하면서 사건을 마무리 짓게 된다.     그 다음 해인 세종 14년(1442) 2월 19일부터 무려 보름 가까이 실시된 춘등(春等) 강무 때에는 짐승을 향해 내관이 쏜 화살이 임금의 막사로 날아들거나(23일), 몰이꾼이 몰던 사슴의 뿔에 받혀 병사 2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났으며, 구군(驅軍:몰이꾼)들이 목을 지키고 있던 순간에 멧돼지가 뛰쳐나와 내구마(內廏馬)를 들이받는 바람에 말이 죽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역대 강무 중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힘든 강무 중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강무 중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불의의 사고를 막기 위해 위와 같은 강무의 절차(節次)와 금령(禁令)을 만들었지만 각처에서 소집된 15,000명 정도의 많은 인원과 기마(騎馬), 활(弓)과 같은 무기 등이 동원되어 야외에서 추운 날씨에 10여일 이상을 행군해가며 하는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보니 가끔 예기치 못한 사고(事故)는 발생했다.   조선 초기 최고의 강무장, 가사평(袈裟坪)  세종 임금이 가장 즐겨 찾았던 조선 최고의 강무장은 연천의 가사평으로서 지금의 전곡읍 은대리와 전곡리, 연천읍 통현리에 걸쳐있는 연천군 제일의 평야 이며 곡창지대로서 점토질 성분으로 된 이곳의 토질이 이른 봄 해빙기나 여름철 우기 때가 되면 인마(人馬)의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질고 미끄러워 예전에 한탄강을 건너서 통현리까지의 20리 벌판길을 통과하자면 기운이 다 빠지고 탈진상태가 되었다는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조선 영조조에 편찬된《輿地圖書, 1757》에는 가사평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전에 어떤 중이 이 벌판을 지나가다 진흙 속에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여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걸음을 옮길 수 없게 되자 입고 있던 가사(袈裟)를 벗어버리고 갔다하여 ‘가사평(袈裟坪)’으로 명명되었다.’ (원문 : 袈裟坪在縣南十里春夏泥滑黏不能着足古有一僧過此氣乏棄其袈裟而去仍名)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연천현 제영(題詠)조에 실린 서거정(徐居正)의 시에는 滑滑春泥怯馬蹄  봄 진흙 미끄러워 말도 가기 어렵구나.楊洲行路互高低 양주서 오는 길 높았다 낮았다 하네.大灘己怕氷猶薄 한 여울을 건널 때 이미 얼음 얇을까 겁냈는데諸嶺辺看雪向齊 여러 영(嶺)을 보니 눈이 아직 그득하구나.破帽輕裘增料峭 헌 모자 얇은 옷은 봄추위 더하는데宦情羈思轉凄迷 환정 나그네 생각 도리어 처량하구나漣州客館依山靜 연천의 객관이 산에 의지해 조용하니攲枕高眠日向西 베개에 기대어 조는 동안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네.        이렇듯 가사평은 아주 찰진 진흙 벌판으로 땅에 물기가 많은 해빙기나 여름 장마철에는 인마의 통행이 아주 힘들었던 곳이다.  습지와 갈대숲, 잡목이 군락을 이루었던 이곳에는 노루, 멧돼지, 꿩을 많은 짐승들이 서식하였고, 땅에 수분이 마르고 건기로 접어드는 11월부터 해동이 되기 전인 2월까지는 말 달리고 사냥을 하면서 군사 조련을 시키는 강무(講武)장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기에 조선 초기에 강무장으로 적극 활용이 되었던 곳이다.    저녁에 세종과 그 일행이 묵은 송절원평(松折院坪)은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세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권과 인사권을 틀어지고 강무행사도 태종의 지휘로 행할 적에 세종 1년(1419) 3월 처음으로 세종과 함께 이곳에서 유숙했다. 그 이후부터 세종은 철원 지경(地境)으로 넘어갔다가도 꼭 연천 송절원(松折院) 뜰에 와서 잠을 잘 정도로 이곳을 선호했다. 과연 송절원(松折院)은 어떤 곳이었을까?    지금도 퇴계원, 장호원 등 지명으로나마 흔적이 남아있는 원(院)은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역(驛)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는 역(驛)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송절원과 약 10리(4~5km) 거리에 옥계역(군남면 옥계리)이 있었던 것은 이와 무관(無關)치 않다고 사료된다.    고려 말부터 약 80리(약 32~40km) 거리 마다 설치되었던 역참, 그 역참과 역참 사이를 보완하면서 도적이나 들짐승으로부터 안전하게 공무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숙식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원(院)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 등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면 어디든지 원(院)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는데, 한양 외곽의 이태원, 홍제원, 퇴계원 그리고 경기 남부에 장호원 등《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상세히 기록된 것처럼 전국에 1,300 여 곳의 원이 운영되었다. 송절원(松折院)은 바로 그 원(院) 중에 하나로, 세종이 재위 원년(1418)부터 세종 24년(1442)까지 20 여 년 동안 무려 17 차례나 송절원터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야영(野營)했다는 것은 절대로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세종은 재위 25(1443)년 이후에 송절원(松折院)을 다시 찾지 못하게 된다. 세종의 건강이 궁궐 밖으로 원행(遠行)을 나가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평소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다. 거기다 아버지 태종이 걱정을 할 정도로 운동량이 부족했다. 궁에서 장시간 각종 서책과 씨름하고, 한글 제정과도 같은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하는 일에 매달리다보니 세종 8년 30세 때에 당뇨가 오고, 재위 11년 33세가 되면 구레나룻이 세기 시작했다. 두뇌를 많이 써야 했던 세종으로서는 스트레스로 인한 백발화가 일찍 진행되는데 이때부터 거의 매년 풍질, 어깨부종, 피부병, 두통, 안질, 요도결석, 기력감퇴 등에 관한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각종 질병을 앓게 된다. 그리고 세종 24년 46세 때는 동신언어(動身言語), 즉 몸을 움직이거나 말만 해도 심한 통증을 느끼는 진기한 병을 앓기에 이르렀다. 지금 같으면 한창 왕성하게 일할 장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종 25년(47세)부터는 이미 온몸에 퍼진 각종 질병(疾病)으로 인하여 심신의 고통이 가중되면서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된다.  셋째 날 – 철원 갈말고개에서 몰이하고 저녁에 마산(馬山)에 머물다   철원(鐵原)의 가을마고개(加乙麻古介)에서 몰이하고 낮참으로 진의천(珍衣川)에 머무르니, 부사(府使) 유의(柳議)가 조복을 갖추고 맞아서 알현하였다. 감사가 술 50병을 올리니, 거가를 따르는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미천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몫이 돌아갔다. 저녁에 행차가 마산(馬山)에 머무르니, 감사가 또 청주(淸酒) 1천병과 탁주 2백 동이[盆], 닭 2백 마리, 돼지 52마리를 올렸으므로, 역시 모두 나누어 주고, 주서(注書) 변효경(卞孝敬)을 보내어 사냥한 날짐승을 종묘에 천신(薦新)하게 하였다.    세종 7년 3월 9일부터 시행한 강무(講武) 행사는 첫째 날은 흥인문을 나와 양주 사천현(沙川縣)을 거쳐 풍천평(楓天平)에 야영을 하게 되는데 사천현과 풍천평은 지금의 양주군 은현면 동두천 지역을 말한다. 둘째 날은 가사평과 불로지산에서 몰이하고 오후에도 오봉산에서 사냥하고 송절원에서 야영하고 셋째 날은 강원도 지경으로 넘어가 철원 갈말고개에서 마산(馬山)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 철원 돼지뜰(猪山平)을 거쳐 평강 갑비천(12일) → 장망산(13일) → 행궁이 있는 평강 분수령(14일)을 기점으로 다시 남하하여 철원 풍천역(16일)을 거쳐 대야잔(大也盞 지금의 대마리 부근) → 고석정 → 영평현의 굴동(17일) → 보장산(寶藏山 현재 미군훈련장으로 사용) → 매장원(18일 每場院, 포천현 인근)에서 유숙을 하고 19일 오후에 궁으로 돌아오는 열흘간의 강무는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세종대왕은 찬바람이 부는 벌판에서 야영하며 군사들을 조련시키며 심혈을 기울여 이루고자 했던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이 어려 있는 가사평(袈裟坪)과 송절원은 우리군민들이 모두 알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너무나 크나큰 역사ㆍ문화적 자산이다.             연천문인협회 회장          연천군 향토문화재 위원                 최병수(崔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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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8
  • 천년 고려미소, 포천 구읍리 거대 석조보살입상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세웠으리라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4.4m 석조보살입상이 포천 군내면 구읍리 구읍천 옆에서 천년을 지켜왔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미륵당(現 용화사 간판) 건물내부가 닫혀 있어 일반인은 볼 수 없다. 구읍천은 포천의 진산(鎭山)인 수원산(水源山)에서 시작해 구읍리를 가로질러 포천군 남북으로 관통하는 포천천과 만난다.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석조보살입상은 화강암 하나로 조성되었고 키가 4.4m이다. 커다란 상호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후덕하면서 위엄있는 인상이다. 머리에 높은 원통형 보관을 썼고 그 위에 판석으로 보개를 얹었다. 판석은 앞에서 보면 사각형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둥글게 반원형이었다. 보관은 덩굴무늬로 장식했으며 정면 원형 테두리 안에 화불이 새겨져 있다.   커다란 상호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이마 정중앙엔 백호가 있다. 눈썹은 둥그런 곡선으로 풍만해 보이고 눈은 반쯤 지긋이 뜨고 있으며 눈아랫선이 수평으로 직선에 가깝다. 코는 오똑하고 뽀족한 편이며 작은 입은 살포시 다물고 있다. 윗입술 아랫부분이 약간 앞으로 튀어 나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미소 짓고 있다. 광대뼈가 나오고 볼이 약간 들어갔으나 곡선으로 부드럽게 표현했다. 하관이 발달하고 긴 주걱턱 외곽을 원만하게 곡선처리했다. 귀는 길게 어깨까지 흘러 내렸다.   목은 3도가 돌려져 있고 3개의 구술 장식 목걸이가 있고 바로 아래엔 옷고름도 보인다. 옷은 통견으로 양쪽 어깨에서 U자로 가슴 앞으로 흘러내리고 양팔에 걸쳐서 여러 개의 주름이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오른손바닥은 가슴 앞에 바깥을 향해 엄지와 제3지·4지를 마주 대고 왼손은 펴서 배 위에 대고 손바닥은 위를 향했다. 하체 중앙에는 허리띠가 비스듬히 대각선을 이루면서 흘러 내린다.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같은 돌로 만든 장방형 대좌 위에 발이 조성되어 있다.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지역주민 남모씨(현 80세, 포천시)는 “한국전쟁 직후 1953년 내가 13살 때 매일 이 곳을 지나 다녔는데 남미륵과 여미륵이 논두렁에 함께 있었다. 남미륵은 여미륵 좌측(동편)에 30cm정도 떨어져 있었고, 여미륵 어깨높이였으며 가슴폭도 그만큼 비례하여 작았다. 그 후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감쪽같이 남미륵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어서 “남녀미륵이 함께 있는 바람에 전쟁도 일어났다고 하면서 함께 있으면 마을에 안 좋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마을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사람들이 남미륵을 구읍천 건너편에 묻었다. 마을사람들만 알고 절대 외부사람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구읍리에는 해발 285m 청성산(靑城山)이 있으며 이 산 능선에 반월산성이 있다. 미륵당 용화사는 반월산성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포천지역은 궁예가 철원에 처음 도읍을 연 896년경 궁예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반월산성은 궁예가 도읍 철원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산성이었고, 철원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써 궁예정권시기 내내 중요했다.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후 5년이 지난 923년에야 명지성(현 반월산성)장군 성달이 왕건에게 귀부했다. 포천지역 일대가 반왕건·친궁예적 정서가 강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사진 위키백과]   고려통일 후 태조와 광종대를 거치면서 지방호족을 중앙으로 흡수하거나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고려왕권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거대한 석조입상을 조성했으며 지역색 강한 석조불보살입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대 석조입상 중에서 천년의 미소를 지닌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특별했다.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세웠으리라 보존상태도 좋고 균형잡힌 단아한 거대 석조보살입상을 포천 구읍리에서 만날 수 있어서다. 질 좋은 화강암과 숙련된 석공들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결같은 천년의 미소를 만날 수 있었으리. 포천석으로 알려진 포천 화강암은 중생대 쥬라기 화강암으로 현재도 전북 익산, 경남 고창과 함께 대표적 화강암 생산지역이다. 또 포천은 궁예 미륵불 환생을 눈 앞에 보고 좌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던 철원, 곧이어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개성이 가까웠기 때문에 고려왕조는 더욱 더 최고의 석공을 동원해 왕권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 왕래가 많은 포천관아 가까운 곳에 거대한 석조보살입상을 세웠으리라. 구읍리 석조보살의 온화하고 후덕한 얼굴과 천년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 당시 포천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사진 위키백과]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정성권]   고려시대 대표적 거대 석조불·보살입상을 다음과 같이 표로 비교해 보았다.  [표 뉴스매거진21. 참고 정성권 '여래형 복식착용 보살상의 등장과 전개(2017)']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10m이상으로 높아서 가까이 서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보아야 한다. 턱이 넓고 이마를 좁게 제작했기 때문에 훨씬 더 높고 더 멀리 보였다. 고려왕조가 황제국을 자칭하면서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위압적이며 괴기하게 조성했을 것이다. 거대 석조입상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교통요지에 조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은 4.4m 높이로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본존불상,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과 비슷하다. 보통 장육불(丈六佛)이라고 말한다. 장육(丈六)은 1장(=10척) 6척을 일컬으며 16척 즉 4.8m이다. 관촉사와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비례가 어느 정도 균형을 갖추고 있다.      고려전기 거대 석조보살입상이 경기도 남부지역인 안성, 여주, 이천에서 발견되었지만 경기북부지역은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이 처음이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고, 55년만에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려전기 거대 석조불상입상이 재조명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구읍리 석조보살입상의 보존상태와 석조물 완성도를 감안할 때 경기도유형문화재로 격상되어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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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02
  • [단독]포천 구읍리 고려 석조보살입상, 방치할 것인가?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 현재 일반인이 볼 수 없어.. 6.25전쟁 직후에도 보호시설없이 논두렁에 서 있던 미륵입상, 어떻게 개인 소유로 되었을까?     관계기관, 지정문화재 등록여부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필요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포천 군내면 구읍리에 높이 4.4m 고려 석조보살입상이 있다. 불교미술 전문가인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정성권박사는 "고려시대 10세기 말기나 11세기 초로 제작연대를 추정한다"고 진단했다. 석조보살 입상이 위치한 주소는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601-1이며, 도로명 주소는 군내면 포천로 1444이다. 현재 포천시 향토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건물 내부가 굳게 닫혀 일반인은 볼 수 없다.     [포천시 향토유적 안내판. 사진 뉴스매거진21]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 현재 내부출입 막아 일반인이 볼 수 없어.. 본지는 1986년 6월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세부내용과 지정 결정과정 관련자료를 포천시에 요청한 결과, 당시 경기도 향토유적지정현황(1986년 6월 현재)을 입수했다. 그 당시 소유자 및 관리자는 개인인 것을 확인했다. 천 년전 만들어진 4.4m 거대 석조보살입상이 구읍천 가까이에 있어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접해 왔을 석조보살입상이 개인소유라는 것에 강한 의문이 든다. 이 거대한 크기의 입상은 천년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고, 그동안 이 거대한 석조보살입상은 미륵보살로 불려왔던 공공의 자산이었고 소중한 지역문화유산이었을 것이다.     6.25전쟁 직후에도 보호시설없이 논두렁에 서 있던 미륵입상, 어떻게 개인 소유로 되었을까?   지역주민 남 모(80. 포천시)씨에 의하면 “6.25 전쟁이 끝나고 1958년인가 1959년에 이 자리에 보호시설이 처음 지어졌다. 그 이전에 아무런 보호시설없이 미륵이 논두렁에 서 있었다. 주민들은 비바람을 막아 보호하려고 포천시 허락을 받아 간이 보호막을 지었고 건립비용은 포천 독지가가 출연했다. 그 후 4, 5차례 증축하면서 지금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지나며 쉽게 볼 수 있는 미륵보살이었던 것이다.   그후 1986년 개인이 포천시 향토유적 소유자 및 관리자로 등록하여 지정되었다. 최근 외부에 공개조차 안 되면서 일반인이  석조보살입상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포천시 향토문화재 제6호 거대 석조보살입상 관리자가 개인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고려시대 거대 석조보살입상 소유자가 어떻게 개인일 수 있는가"하는 합리적인 질문을 누구든지 던질 수 있다. 제6호 포천시 향토유적 소유자 및 관리자로 등록한 지 어언 33년이 흘렀다. 현재의 석조보살입상 소유자 및 관리자가 누구인지를 해당 기관인 포천시가 발벗고 나서서 확인해야 하겠다.    현재 용화사를 관리하고 있는 윤모씨는 "미륵보살이 건물 안에 갇혀 있어 무척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쉽게 친견할 수 있게 미륵보살을 개방하고 이 일대를 문화특구로 정비했으면 좋겠다. 개인 돈이라도 있다면 내가 나서서 그렇게 만들고 싶을 정도다. 포천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너무 무관심하고 지역주민들 역시 여기에 미륵보살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륵당 외부모습. 사진 뉴스매거진21]          현재 석조보살입상이 위치한 해당 토지는 1,076㎡이며, 토지 소유주는 1977년 소유권을 이전 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용화사 간판을 부착한 건물용도가 무엇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현재 내부출입을 막아 일반인이 석조보살입상을 친견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 건물이 전통사찰인지, 기도원인지 아니면 개인용도로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구읍천과 불과 20여미터 거리에 있어 홍수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포천시에 건축물관리대장 발급신청 결과 “해당주소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라는 답변이었다. 이 지역은 생산녹지지역이라서 건축물은 행위제한을 받고 있다.  이 건물의 건축허가여부와 향후 실행계획을 포천시에 정보공개청구 신청했으며 현재 포천시의 공식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관계기관, 지정문화재 등록여부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 필요  관계기관인 문화재청, 경기도 그리고 포천시는 고려 석조보살입상이 가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문화재위원회가 조사·심의하게 하고 도지정문화재 등록여부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포천시는 현재의 석조보살입상 소유자 및 관리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여 소유 및 관리관계를 명확하게 밝혀야 하겠다. 그리고 토지소유자와 점유자와 협의해 포천시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문화재청장, 경기도지사, 포천시장이 앞장서 고려 문화유산인 석조보살입상에 대한 보호 및 관리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없이 시급한 일이다. 물론 전문학예사를 확보하는 등 포천시장의 강한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겠다.           [포천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사진 뉴스매거진21]   불교미술 전문가 정성권박사는 “반월산성과 궁예미륵불 그리고 구읍리 석조보살입상, 포천향교를 하나로 묶어 삼국시대-후삼국-고려시대-조선시대을 잇는 ‘포천역사문화벨트’로 만들고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강원도 철원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궁예 태봉국 도성과 연계해 DMZ와 포천, 철원, 금강산까지 포함한다면 세계 최고의 역사문화관광단지로 통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포천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권고하고 있다.        *관련법규 「건축법 시행령」등 정리 별표1 제4호 제2종 근린생활시설 나목에 의하면 종교집회장에 대한 건축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기도원, 사당이 포함되며, 전통사찰의 경우 「전통사찰의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 전통사찰법 시행령에 따르면 전통사찰지정 신청서를 재산목록 및 부동산 소유를 증명하는 서류와 함께 시·도지사에게 제출하여 지정받도록 명시되어 있다. 건축행위 제한은 포천시 도시계획 조례 별표15에서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문화재를 보존하여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함과 아울러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70조(시·도지정문화재의 지정 및 시·도등록문화재의 등록등)는 2018년 12월 24일 개정, 시행일 2019년 12월 25일    2018년 12월 24일 신설된 제70조 3항과 4항 3항 “시·도지사는 그 관할구역에 있는 문화재로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하거나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지 아니한 유형문화재, 기념물(제2조 제1항 제3호 나목 및 다목은 제외한다) 및 민속문화재 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필요한 것을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다. 4항 “문화재청장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문화재에 대하여 시·도지사에게 시·도지정문화재나 문화재자료(보호물이나 보호구역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로 지정·보존할 것을 권고하거나, 시·도등록문화재로 등록·보호할 것을 권고할 수 있다. 이 경우 시·도지사는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화재 지정절차 또는 등록절차를 이행하고 그 결과를 문화재청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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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30
  • [역사기행][우리지역 역사] 통정공 강회백 묘소-시제 풍경
          연천 왕징면 강내리 산 175-3번지.   민간인통제구역에 진주강씨 박사공파 7세 통정공 강회백(姜淮伯) 묘소가 있다. 이 곳에서 고려말 진주강씨 박사공파 6세 공목공 강시(1339~1400), 7세 통정공 강회백(1357~1402), 8세 대민공 강석덕(1395~1459) 세 분을 기리기 위해 음력 3월20일 춘향제와 음력 10월2일 시제를 모신다. 100여명이상 친족들이 전국에서 참석하고 있다. 강내리 능말(능이 있는 마을)에 위치하며 한자로 능촌(陵村)이라고 한다. 통정공 강회백 묘소를 위시하여 후손들 묘소가 있다. 7세 통정공은 고려말 정당문학(종2품 문관1명: 행정총괄) 겸 사헌부 대사헌(종2품 문관1명: 감찰총괄)을 역임하였고 강희안, 강희맹의 조부이다.   6세 공목공 강시(姜蓍)는 5형제를 두었고, 통정공(通亭公) 회백, 통계공(通溪公) 회중, 소감공 회순, 재신공 회숙, 진원군 회계이다. 진주강씨 후손들은 5형제를 오룡(五龍)으로 부르고 있다.  공목공 묘역은 북한 장단군 대강면 나부리 황학산이다. 연천 임진강에서 사미천을 거슬러 올라 DMZ 북방한계선에 위치해 있다. 현재 강내리 묘역에 단을 세우고 가묘로 모시고 있다. 이렇듯 남북분단으로 조상의 묘역을 찾지 못하는 아픔과 아쉬움이 진주강씨 박사공파 후손들에게 있다.   특히 통정공 묘소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모습)으로 고려말 무학대사가 점지해 주었다고 전해온다. 전국 10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멀리 서북쪽 고왕산 정기를 이어받아 임진강을 등진 채 산에서 내려오다 낮게 불쑥 솟은 언덕봉우리 위에 묘소를 사용했다. 멀리서 볼 때 마치 거대한 왕릉과 같아서 전율을 일으켰던 첫 인상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통정공 묘소 뒤 산언덕에는 후손들 묘소들이 있고 왼쪽 끝에 재실 '덕왕사'(德旺祀)가 있다.                연천 강내리 민간인통제구역에서 시제를 지내기 때문에 연천주민들도 보기 어려운 귀한 풍경이다. 시제 전날과 당일 아침까지 쏟아진 비 덕분에 하늘이 맑게 개이고 햇살이 따사로왔다. 진주강씨 후손들은 북한에 있는 조상묘역에 참배하는 날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연화부수(蓮花浮水)=    이동하       임진강 흘러흘러  잠시쉬어 가는가    백학이 깃을 트니  오룡이 날았던가    오래된 미래처럼  연화부수 보이네    육백년 세월에도  그모습 그대론데    분단의 비극역사  연잎에 비친이슬    시절운수 돌아오니  한 후손 찾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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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31
  • 경기도, ‘지역주민이 바라보는 DMZ 세계유산 등재 추진’ 주제로 포럼 개최
    경기도는 12일 연천 전곡선사박물관 강당에서 ‘지역주민이 바라보는 비무장지대(DMZ)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주제로 DMZ 세계유산 등재기반 구축 포럼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번 포럼의 목적은 비무장지대(DMZ)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앞서 지역주민과의 공감대 확산을 위한 것으로 문화재청․경기도․강원도, 파주시․연천군 관계자와 세계유산 문화유산 자연유산 전문가, 민통선 주민 등 약 100여 명이 참석했다.박은진 국립생태원 경영기획실장의 ‘비무장지대(DMZ)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보존과 활용’ 기조강연 이후 파주시와 연천군 주민대표가 ‘접경지역에서의 삶을 바탕으로 한 비무장지대(DMZ)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지역주민의 생각’을 발표했다.이날 사례발표는 파주시 접경지역에서는 김동구 대성동 주민대표, 이완배 통일촌 대표, 김경숙 해마루촌 주민대표, 공지예 장단콩 초콜렛 생산업체 운영자가, 연천군 대표로는 김경도 횡산리 주민대표, 이광길 삼곶리 주민대표, 박영관 나룻배마을 주민대표, 박종근 연천 비무장지대(DMZ) 보존회 회원이 참가했다. 비무장지대(DMZ) 세계유산 등재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핵심 공약으로 도는 20세기 국제이데올로기 전쟁의 상징이자 자연생태계의 보고이며, 최근 평화의 공간으로 부각되는 비무장지대(DMZ)를 전 세계 인류가 기억하고 보호할 수 있도록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경기도는 문화재청, 강원도와 비무장지대(DMZ) 세계유산 공동추진을 협의해 왔다. 지난 3월에 비무장지대(DMZ) 보존관리와 세계유산 남북공동추진을 정부 정책과제에 포함해 달라고 문화재청에 건의했으며 4월에는 국회의원 45명과 함께 ‘DMZ를 세계유산으로’를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한편, 경기도에는 수원화성과 남한산성, 조선왕릉(40기 중 31기) 등 3개의 유네스코 등재 세계유산이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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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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